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시대를 앞서는 생각을 했지만 수완이 좋지 못해 실패한 이가 있다. 그 일에 혼신을 다해 당대에는 유명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잊혀져 버린 존재. 무언가를 추구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에 관한 <밴버드의 어리석음>(양철북. 2009)에 ‘밴버드’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1850년대, 당시 미국 롱아일랜드 지역에 한적한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게도 외관이 예스럽고 장엄한 성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성 주인인 밴버드의 이름을 붙여 그 성을 ‘밴버드의 폴리folly’라고 불렀다. 그 말에는 다소 비꼬는 뜻이 숨어있었다. ‘폴리’는 ‘주거가 아닌 장식을 목적으로 짓는 건물’을 가리키는데 ‘어리석음’이라는 뜻도 있다.
책에 따르면 존 밴버드는 미국 개척 시대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했던 예술가였다. 그가 공연 입장료로 받은 엄청난 동전을 일일이 셀 수가 없어 은행은 돈자루를 저울로 달았을 정도였다. 그는 유럽과 미국을 휩쓸던 공연 기획자이자 화가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움직이는 파노라마’ 였다. 그것은 그림을 그린 거대한 천의 양 끝을 밧줄 고리로 묶어 줄을 따라 천이 움직이는 작품을 말한다.
“밴버드는 거대한 파노라마 캔버스가 축 늘어지지 않도록 캔버스에 밧줄 고리를 달고 줄을 따라 움직이게 하는 장치를 고안했다. 무척 독창적인 방식이라 특허를 받았고, 몇 해 뒤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리기도 했다.” (p.100)
당시로는 획기적인 최초의 ‘활동’사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뱃사공의 경험을 살려 높이 3.6미터, 길이 800미터의 거대한 천에 미시시피 강 풍경을 그렸다. 그것은 이전의 어느 작품보다 거대했다. 거기에 특허 받은 장치를 이용해 천을 움직여 강이 흐르는 것 같은 효과를 주고 내레이션과 피아노 연주를 더했다.
첫 공연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포기하지 않고 증기선 선원들에게 공짜표를 나눠주었다. 그림으로 그린 풍경이 펼쳐지는 동안 그는 강 위에서 겪음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적을 만났다는 허풍,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넘긴 사건, 불가사의한 풍경 등 과장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후 공연에서는 배경음악도 깔고 독창적인 조명을 사용함으로써 완벽한 종합예술을 창안해 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1849년에는 윈저 궁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왕가 앞에서 특별 공연도 했다. 돈도 충분히 벌었고 왕가의 인정도 받아 예술가로서 마침내 성공했다. 그는 사회 모든 계층에 파고들었다. 밴버드의 공연을 본 찰스 디킨스는 존경심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하의 그림에 아주 큰 흥미를 느꼈고 매우 즐거웠습니다.” (p.106)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의 작품을 모방한 해적판이 등장했다. 밴버드는 다른 사업을 시작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막대한 재산을 쏟아 부어 24만 제곱미터짜리 땅에 영국의 윈저 성과 똑같이 생긴 성을 쌓던 백만장자 밴버드는 말년에 완전히 빈털터리가 됐다.
그는 ‘밴버드의 어리석음’이라고 비아냥을 듣던 ‘밴버드의 폴리(성)’를 빼앗긴 채 결국 초라한 죽음을 맞는다. 가족들은 그의 장례비용도 갚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그의 거대한 파노라마 천은 ‘조각조각 잘라 집을 지을 때 단열재로’ 쓰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이후 에디슨의 영화 발명으로 밴버드의 ‘움직이는 파노라마’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말년의 실패와 어리석음 때문에 ‘밴버드의 폴리’로 기억되는 불운한 천재 밴버드. 열정을 다해 살아간 그에게 실패자라는 딱지는 모독으로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