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롱아일랜드 대자연 속 삶에서 건져올린 ‘나’
[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일반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고 나무판 위에 그림을 그리는 김희자 작가의 ‘심리학적 풍경: 나무의 영혼을 찬미하다(Psychological Scenery : Homage to Tree Soul)’전이 31일까지 모란미술관에서 열린다.
김희자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60, 70년대 한국사회에서 여성 작가에게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이른바 ‘국전’에서 3회 연속 입선하였으나 더 이상 큰 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국전 심사위원이자 은사인 류경채는 “그림도 그리지 않고 애 들쳐업고 나타날 건데 뭐 하러 아깝게 상을 주느냐”고 답하였다. 이 사건은 오히려 작가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해보는 자유를 주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직사각형의 캔버스의 아니라 맘대로 오려내어 형태를 만든 셰이프드 캔버스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은사의 말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화가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77세의 지금도 여전히 그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김희자 작가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그대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외로움, 슬픔, 분노와 같은 것을 맘으로 느끼게 한다. 그는 자연과 영적인 교감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내고 영감의 원천이 되는 나무가 간직해온 숨겨진 이야기를 회화작품으로 전달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나무의 이야기, 가장 오래되고 느린 그 언어는 우리 내면의 울림을 통해서만 증폭되어 세상에 알려진다.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는 일임에 다름이 아니다.
김희자의 작품들 속엔 나무, 돌, 거울과 같은 것들이 있다. 드넓은 바다가 나무의 결을 따라 파도를 드러내고 때론 작은 집 안에 작은 여자와 남자가 있었다. 그것은 이국에서 지독한 고독과 내부에서 일어난 심적 고통이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통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여성, 결혼의 제도, 디아스포라와 같은 것들을 대면하는 용기에 대한 기록의 현장이기도 했다. 김희자 작가는 한국을 떠나 미국, 롱아일랜드의 대자연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작가는 외로운 타국 생활에서 자연과 산책길에 자리하고 있던 나무에게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의연한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굳건히 서 있는 나무에게서 살아가는 힘을 얻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노년의 작가는 영은미술관 레지던시에 머물며 눈뜨며 잠들기까지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몰두한다. 작가는 사람의 지문처럼 유일무이한 나무의 결을 작업에 보여줌으로써 나무의 신비로움과 생명력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마음의 이야기 즉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무의 결을 빌려 전하는 그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느낀 외로움의 심상(心象)을 작품 속에 온전히 담아내는 작업을 한다. 이를테면 나무테는 물결이 되어 화면을 뒤덮는다. 그 물결은 자신이 살던 집 앞의 바다이기도 하고 풍파 가득한 세상이기도 하다. 그 앞에 선 나무, 집, 사람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관람자인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김희자의 작품 앞에 서면 그 길고도 오래된 나무의 이야기, 세대를 지속하여 변함없이 사랑하고 고통받고 관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연 앞에 나타났다 스러지는 인간 삶의 연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들에 대한 찬사를 멈추지 않는, 지치지 않는 힘을 본다.
김희자 작가의 회화는 이른바 입체회화로 불리기도 하는데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라 바닥면이 울퉁불퉁한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의 형태를 만들어서 그린 부정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좋은 나무판을 얻기 위해 품을 파는데, 100장이 넘는 원목 나무판 중 겨우 2~3개를 선정할 정도의 심사숙고하여 나뭇결을 골라 화면을 마련한다. 완전히 건조된 최상의 나무판은 나무가 가진 생명력 그대로 옹기나 나이테를 드러낸다. 그 평평한 나뭇결의 향연은 잔잔한 물결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멀리 퍼져나가는 음파나 진동을 연상하게도 한다.
나무판을 들여다보노라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작가는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것은 내면에서 들여오는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오래된 나무의 언어처럼 온갖 은유와 비유를 통하여 진실을 토로하는 데에 다다른다.
미술평론가 조은정은 김희자의 작품은 관람자에게 위로를 넘어 관조의 세계로 이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전시 서문에서 “나이가 들면 주변의 것들을 털어내고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지만 그 또한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거친 파도를 담은 바다가 나뭇결에 담기고, 그 나무의 기억들이 울울한 숲속으로, 머리 위에 반짝이던 별들로 나타난다. 형상이야 무엇이든 결국 우리가 김희자의 화면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나무라는 물질을 통해 육화한 인간의 고뇌와 자연의 경이로움이다. 나무의 영혼에 대한 찬미, 그것은 나무처럼 살아낸 우리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경의이자 그것을 품어준 모든 우주존재에 대한 감사함의 만트라”라고 하였다.
이번 전시는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지원하는 지역전시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영은미술관과 모란미술관이 함께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