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포스트잇] “엄마에게는 딸이 필요해”에 담긴 서늘한 의미
[책속의 포스트잇] “엄마에게는 딸이 필요해”에 담긴 서늘한 의미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7.11.24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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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오빠에게>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지음 | 다산책방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엄마에게는 딸이 필요해” 흔히 하는 말이다. 이 한 문장에 깔린 의미를 셈해본 적이 있는지 자문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저 말에 남편, 아들은 공감 못하는 예민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해소할 대상, 어쩌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받아낼 대상, 엄마에게 감정의 배수구 역할을 할 그런 존재를 말하는 건 아니었는가. 덜컥, 심장을 주저앉힌 소설 속 성인이 된 딸의 심경을 그린 대목이다.

‘“나에게는 너뿐이야”라는 메시지를 유진은 오래도록 들어왔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다섯 살, 여섯 살 즈음부터 유진은 엄마 정순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낮잠을 자다 눈을 뜨면 자기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정순의 얼굴이 보였다. 울어서 눈이 부어 있을 때도 있었고, 울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가장 두려웠던 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정순의 구겨진 얼굴이었다. 조금만 마음의 방향을 틀면 엄마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유진은 정순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노력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미있게 각색해서 이야기하기도 했고 정순이 웃음을 터뜨리는 지점을 찾아내어 비슷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정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때 유진은 서늘한 안도감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정순이 유진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유진은 정순에게 들었다. 아무도 없을 때 할머니가 정순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아빠는 어떻게 정순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지 아빠와의 결혼이 그에게 어떤 고통을 줬는지에 대해서. 유진은 정순을 사랑했으므로 그녀가 겪은 고통에 언제나 마음이 찢기는 경험을 했다.(중략)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니. 누가 내 얘기를 들어주겠니. 정순을 그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느껴졌던 그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을 옥죄었다. (중략) 그녀는 스물여덟에 집을 나왔다. 엄마와 떨어져 산 이후로 유진은 만성 편두통을 더 이상 앓지 않았다. 잦은 급체도 멈췄고 손대면 멍이 든 것처럼 뻐근하던 명치끝의 통증도 사라졌다.’ <현남오빠에게>(다산책방.2017), 최은영 <당신의 평화> 중에서

주인공 유진은 평생 할머니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아빠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엄마의 유일한 친구이자 분신이다. 너무 어렸던 자신에게 감정의 짐을 나누어지게 한 엄마로부터 딸은 탈출하고 객관의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다.

가부장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소설로 페미니즘 소설집에 실린 단편이다. 작가 최은영은 한쪽의 일방적인 굴종을 요구하고 오만 가지 방법으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방식으로는 어떤 인간도 해방될 수 없으며 굴종을 요구하는 인간마저도 마찬가지라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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