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다` 남자들의 대변자로 컴백한 박범신
`쪼다` 남자들의 대변자로 컴백한 박범신
  • 북데일리
  • 승인 2005.12.0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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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소설이 아니라 <남자들, 쓸쓸하다>(푸른숲. 2005)라는 제목의 산문집이다. 한국에서의 고된 `남성살이`를 여성 눈치 안보고 마음껏 털어놨다.

한국남성 대부분이 ‘권력자’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한’ 환경을 탓해도 보고, 이상을 잃어야만 성실한 남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울분의 시간들을 고자질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일찍이 무엇을 바치라고 한사코 요구했던가. 남자다운 이상과 기상을 바치라고 요구했던가. 이상을 다 버리고 ‘밥과 텔레비전과 승용차’만 벌어오면 된다고 한사코 요구함으로써, 이 나라의 모든 남자들을 ‘쪼다’ ‘머저리’ ‘멋대가리 없는 중년 남자’로 만든 것은 아닌가” (본문 중)

저자는 ‘남자가 이상을 잃으면 억만금을 벌어 와도 남자다울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남자들을 이상과 꿈을 잃지 않는 남자가 되게 해야 ‘아름답고 멋진 내 남자’를 가질 수 있다고 부르짖는다.

여자보다 일찍 죽는 남자, 침대에서 아내로부터 돌아누울 수밖에 없는 남자. 기력이 쇠해진 우리시대 남자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무작정 남자들을 봐 달라고 떼쓰는 것은 아니다.

‘남편으로 사는 일’ 이라는 제목으로 부부생활의 속내도 털어놨다.

연애시절. 박범신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오뎅인 줄 알았고 아내는 박범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찐빵인 줄 알았다. 결혼 한 다음 걸핏하면 오뎅국을 밥상에 올리는 아내를 보고 감동했지만 1년이 되고 나서야 “사실은 오뎅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 시절 가난한 데이트가 남긴 ‘흔적’은 결혼생활을 통해 저절로 조금씩 지워져 가고 있었다.

‘연애 시절은 은폐가 가능하다. 그러나 결혼은 다르다’라는 작가의 말이 새삼 실감나는 대목이다.

결혼생활 30년을 돌아보면 맞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로 ‘안 맞는 것’ 투성이라는 ‘고백’은 무척 솔직하다. 아내는 붉은 색을 좋아하는 데 자신은 아주 싫어하고, 아내는 국수나 만두 같은 것들을 좋아하지만 자신은 밀가루 음식을 주식으로 먹기 싫어하며, 아내는 튀김류를 좋아하지만 자신은 담백한 나물류만 찾는다는 것이다.

아내는 푹신한 매트에서 자야 몸이 상쾌하고 자신은 푹신한 매트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다. 침대도 둘, 침실도 둘로 나눠 써야 할 일이다. 아내는 걸핏하면 덥다면서 얇은 이불을 찾고 자신은 여름에도 두툼한 이불을 좋아한다. 아내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지만 자신은 영화든 연극이든 러브스토리를 극도로 싫어 해 함께 공연이나 연극 구경을 하기 어렵고 술 먹는 취향도 너무 달라 함께 술을 마실 수도 없다.

이에 비해 맞는 것은 참 적다. 이런 불평 뒤에 내린 결론이 백미다.

“그렇다면 이게 뭔가. 백번 다시 생각해도 아내와 나는 헤어져야 옳다. 헤어지지 않고 함께, 그것도 수십 년씩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의 삶이나 다름없다. 그렇게도 맞는 건 없고 서로 맞지 않는 건 지천이니 어떻게 하루인들 함께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참 이상하다. 30 여 년 간 살아온 잔인할 만큼 서로 잘 맞지 않는 아내하고 앞으로도 30여년 은 더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급적 함께 죽어야지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사랑...은 모르겠다. 그러나 앞으로도 아내와 좋은 친구로 넉넉하게 살아낼 자신이 있으니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아내와 내가 잘 맞을 거라고 희망을 품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의 시험을 통과해내고 오래오래 함께 걸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깊은 이해와 연민이지 스타일에 꼭 맞아야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아내는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오래 함께 살면서 서로 안 맞는 건 오히려 많아지지만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지는 않는다. 그런게 인생이다“(본문 중)

작가 특유의 진솔하고 두터운 목소리가 주장하는 것은 남성을 남성답게 살라고 밀어붙이지만 말고 ‘인간’으로 봐달라는 것이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기계로만 보지 말고 그들의 심장 에 묻혀있는 이상과 꿈도 들여다 봐달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이루게 해주지는 못할 지라도 적어도 한번쯤은 뜨거운 애정으로 돌아봐달라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 볼 때 남성은 여성과 더불어 더 이상 쓸쓸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오랜만에 듣는 박범신의 목소리도 반갑지만 꾸미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진솔한 글은 더욱 흐뭇하다.

(사진 = 이스라엘 사진작가 토머 가니하르 作 `Holy Land X`)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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