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가 ‘돼지들에게’ 꼿는 불온한 강철비수
최영미가 ‘돼지들에게’ 꼿는 불온한 강철비수
  • 북데일리
  • 승인 2005.12.0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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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치욕이다. 시는 그 치욕의 강을 건너는 다리 같은 것`

7년 만에 돌아온 최영미의 신작 시집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 2005)의 시작 말이다. 늘, 최영미에게 삶은 ‘치욕’의 바퀴가 굴러가는 레일이었다.

“무어 더 볼 게 있다고/ 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새들은 아직도’ 중)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라는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

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 비평사)에 실린 두 편의 시는 `비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삶의 고역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새에게 속삭이는 시인의 목소리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시 불 밝히는 무대에 거는 ‘관심 없음’을 표명하는 목소리는 세상에 거는 희망을 비웃었다.

그 후 4년의 세월이 희망의 씨앗을 움틔웠을까. <꿈의 페달을 밟고>(창작과 비평사. 1998)의 어조는 일말의 ‘낙관’을 시사했다.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꿈의 페달을 밟고’ 중)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행복론’ 중)

꿈의 페달을 밟고 도착한 현실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가능성’을 노래했고, 시시한 해지만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또 다른 용서를 부탁했던 시인의 태도는 전작과는 달라진 화해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7년 만에 돌아온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 2005)는 어떤 모습일까.

"머릿 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랜 역설이……나는 슬프다" (`돼지의 변신` 중)

10년전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직설화법으로 돌아간 듯, 시대를 향한 ‘비관적 비판’의 독설에 살가죽이 아려온다 .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약한 존재로서 `진주`를 유린하는 `돼지들`의 횡포와 탐욕을 비판하고 싶었다"고 말한 시인의 의도는 강경하고 표현은 직설적이다.

“그처럼 당연한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 했던가// 박정희가 유신을 거대하게 포장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과대포장했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관념으로 도배된 자기도취와 감상적 애국이/ 연구실에서 광장으로, 감옥에서 시장으로 나온 흑백논리가/ 종이에 인쇄되어 팔리는// 이것이 진보라면 밑씻개로나 쓰겠다/ 아니 더러워서! 밑씻개로도 쓰지 않겠다.” (‘시대의 우울’)

자신의 ‘시’를 작품 안에서 늘 스스로 평가해왔던 최영미는 이제 오욕을 씻어내기도 전에 아니 인정하기도 전에 시대와 슬그머니 화해하려는 지식층을 면전에서 비판한다.

‘연구실에서 광장으로, 감옥에서 시장으로’라는 표현을 빌어 그들의 위선을 ‘비아냥’ 거린다. 그리고 그 화해의 손아귀를 결코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결단을 내보인다.

‘진보’를 논하기 전에 이미 시인의 밑씻개로도 쓰이지 못할 위선의 논리는 그가 94년에 되뇌였던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말의 반복적 울림 앞에서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는 우스운 ‘허풍’ 일 뿐이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시대를 향한 비판의 정신을 어떤 미사여구로도 녹여낼 마음이 없는 열기가 느껴지는 당찬 복귀다.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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