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한 권의 따뜻한 책은 큰 위로가 된다. 꼭 그런 상태라면 나희덕 시인이 5년 만에 펴낸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달.2017)를 처방한다. 쉬이 읽히지만 나 시인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글은 긴 여운을 남겨서다.
책에 소개된 런던에서 열린 한 지체장애인 자선 공연 이야기다. 장애를 지닌 음악인들이 감동의 무대를 선보였다. 뇌성마비 피아니스트는 연주 시작 전 어린 시절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고 손발은 온통 뒤틀려 있었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하루에 열 시간 이상 건반 앞에 앉기를 꼬박 3년, 마침내 오그라든 손가락이 조금씩 펴지고 손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사연을 전했다. 말을 이어가는 중에도 얼굴과 몸은 자주 뒤틀렸지만, 표정은 온화하고 밝았다.
연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뛰어난 기교에 감탄하는 것보다 달아나려는 손가락을 붙들고 절망의 벽에 부딪혔을 수많은 순간이 한 음 한 음 아프게 박혀 있는 듯해서다.
시인은 뇌성마비 피아니스트를 ‘장애라는 새장을 뚫고 나와 마침내 건반 위에서 자유를 얻은 한 마리 새’로 표현했다. 절망과 희망이 되었을 건반 위의 슬픈 몸짓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이 밖에 영국 템스강변에 묘비 대신 벤치에 죽은 이를 기리며 이름을 음각한 이야기, 어느 여름밤 백사장에서 금속탐지기로 동전과 귀금속을 찾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 남자의 사연 등 시인이 국내외 산책길에서 만난 45편 이야기가 실렸다.
작고 소소한 이야기들과 시인의 따듯하고 깊이 있는 사색은 황량한 마음에 한 줄기 작은 성냥불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