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짐승처럼...200년 전 '악녀 일기'
사람을 짐승처럼...200년 전 '악녀 일기'
  • 이동환 책전문기자
  • 승인 2009.07.0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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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때문에 너무 행복해"... 인종차별 생생한 기록

 

[북데일리] 19세기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가이아나(지금은 수리남)는 소수의 백인이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백인들은 유럽의 귀족과 같은 삶을 누렸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들의 처절한 노동을 기반으로 한 결과였다. 신간 <2백 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내인생의책. 2009년)는 농장주인 백인 딸의 일상을 일기 형식으로 그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라서 너무 행복해, 난 너희들과 다르게 태어났어, 날 달라, 그래서 행복해.”

주인공은 이제 막 14살이 되었다. 성년이 된 기념으로 많은 선물을 받는다. 그 가운데 특이한 선물은 바로 흑인 남자 노예였다. 게다가 채찍까지 선물로 받는다. 요컨대 그녀는 이제 채찍을 자신의 손에 잡고 이를 휘두르는 나이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열네 살이 된 그녀가 아는 것은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과 맞는 사람은 다르다는 점이다. 그녀가 아는 세상은 피부의 색에 따라서 다르다. 사람과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노예가 있다.  이것이 그 시대의 가치관이고 세계관이었다.
노예로 인해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어느 날, 주인공의 아버지가 예쁜 여자 노예를 사온다. 그녀는 아버지가 그 노예를 사온 의미를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그 노예로 말미암아 울고 있다. 이 상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신의 귀를 막는 일뿐이었다. 자신의 옆으로 노예가 다가오자 따귀를 한 대 갈긴다. 엄마가 우는 일이 모두 노예의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 주인공의 노예는 아직 어리다. 마시지나 머리 손질, 옷가지 정리도 해주지 못한다. 주위에선 “그럼 그 애를 팔아 버려.”라고 말한다. 일기엔 그 말을 들은 소감이 나온다.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난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다.” 노예를 사고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라는 대목이 정말 발칙하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아프더라도 주인 입장에서는 마음이 아픈 게 당연한일이건만, 악녀의 눈이 비친 노예는 동정조차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다. 채찍에 맞는 노예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은 채 식사에 몰두하는 식이다.  200년 전 식민지 사회에서 피부색의 흑백 차이는 마치 낙인처럼 찍혀있다. 피부색의 차이로 인한 차별은 그대로 남아있다. 정도만 약해졌다 뿐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남아시아 출신 근로자들에 대한 차별도 이의 연장선에 있다. 인종 간에는 어떤 우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과학적인 사실이건만,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와 나를 나누는 이분법은 그대로 살아있다. 특히나 눈에 보이는 피부색의 차이는 우열을 나누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족주의적 전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네덜란드 작가인 돌프 페르로엔(Dolf Verroen)이다. 50년 넘게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을 쓰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서문에 나와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꾸며 낸 인물이다. 하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일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것들이다. 역사란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저자는 악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인종차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악녀의 생각과 행동은 독자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해준다. 인종차별의 역사, 그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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