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그림 한장이 '소설'보다 많은 의미
때론 그림 한장이 '소설'보다 많은 의미
  • 이동환 책전문기자
  • 승인 2009.04.30 1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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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특별한 옛 그림 이야기

  
 


[북데일리] 글을 쓰는 사람은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글 속에 녹여서 표현하기 마련이다. 읽는 사람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쓴이가 처해있는 개인적인 처지나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글쓴이의 취향과 가치관과 같이 여러 가지를 알아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려운 책은 전문가의 해제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화가도 자신이 그린 그림에 어떤 메시지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뭉크의 <스크림>은 그의 불행한 병력과 가족의 죽음 등 화가의 개인적인 환경을 알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그림 또한 의미를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그림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현대가 아닌 과거 그림도 마찬가지다.

오주석은 조선 시대의 그림의 의미를 읽어주는 첫 손가락의 인물이다. 그는 2005년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생전에 신문을 통해 발표한 글이 책으로 만들어졌다. 신간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2009년)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그림 27장에 들어 있는 의미를 독자들에게 읽어 주고 있다.

27장 가운데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6점으로 제일 많고, 겸재 정선 4장, 혜원 신윤복 2장, 표암 강세황 2장 그리고 추사 김정희 1장 등 조선 최고의 화가들의 그림이 들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첫 번째 그림은 신윤복의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이다.

조각달이 떠있는 밤에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여자는 다소곳이 눈을 내리 뜨고 있는 모습이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 같기도 하다. 그림 왼 쪽 부분에 있는 화제(畵題)에는 “달도 기운 야삼경 /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라고 적혀있다. 이 화제는 조선 선조 때에 정승을 지냈으며, 화류계에서 놀기를 좋아했다는 김명원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요컨대 이 그림에서 혜원 신윤복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바로 은밀한 만남이다. 저자의 말.

“신윤복은 남녀 간의 정을 주제로 한 그림의 명수였다.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소설 한 편보다 더 소상하다.”(25쪽)   


혜원 신윤복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 19세기 초반


한국 그림이 서양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공간의 활용에 있다. 바로 ‘백면(白面)’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선인들은 크고 위대한 사물, 즉 하늘과 물을 여백으로 남겨두었다.”(36쪽)고 표현한다. 즉 서양화는 하늘과 강이나 바다에 색칠을 하지만, 한국 그림에서는 그냥 화폭을 비어 놓는다는 것. 공간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공간의 미학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세한도>를 꼽을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歲寒圖)>를 1844년에 그렸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시기이다. 귀양 가있는 사람에게는 친구도 멀어지는 법. 그러나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은 베이징에서 사들이 귀한 책을 멀리 바다건너에 있는 스승에게 보냈다. 추사는 고마움을 그림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옛글에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사람은 그것이 다해지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59쪽)
그림에 보면 누추해 보이는 집을 푸른 소나무가 감싸고 보호해주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 소나무는 바로 이상적이다. 오주석은 “<세한도>엔 추운 시절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옛정이 있다. 그래서 문인화(文人畵)의 정수(精髓)라 일컬어진다.”(61쪽)고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1844년

 
작가 미상인 <이재 초상>에서 보면 그림의 주인공인 이재의 눈빛이 아주 강렬하다. 게다가 복색이나 차림이 단정하고 강인해 보인다. 이 그림을 본 후 저자는 허리를 곧게 펴고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재의 마음에 있는 성실함이 저절로 외모에 드러났기 때문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주석은 그림 한 장에 담겨있는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친절하게 읽어주고 있다. 그의 글을 따라 읽다보면 독자들은 그림에 담겨진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 곁에는 그림을 읽어줄 오주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누가 우리 옛 그림의 가치를 되살려 줄까. 오주석의 설명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의 부존재가 우리를 한 없이 허전하게 만든다. (그림제공 : 월간미술)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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