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마동수(馬東守)는 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 마동수는 1910년 경술생(庚戌生) 개띠로, 서울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내고, 만주의 길림(吉林), 장춘(長春), 상해(上海)를 떠돌았고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서 625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를 살고, 69세로 죽었다. 마동수가 죽던 해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 마동수의 죽음과 박정희의 죽음은 ‘죽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관련이 없다. 마동수의 생애에 특기할 만한 것은 없다.” (p.7) - 김훈 장편소설 <공터에서>(해냄. 2017)중에서
올해 2월 장편소설 <공터에서>를 출간한 소설가 김훈이 지난 11일 저녁 일산 독자들과 만났다. 한양문고 주엽점에서 열린 ‘지역작가와 지역서점의 만남‘ 행사를 통해서다. 서울 태생인 그는 현재 20년 째 일산에 살고 있는 이 지역 주민이기도 하다. 이날 강연장에는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많은 독자들이 함께 해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터에서>는 그가 <흑산>이후 6년 만에 쓴 작품으로, 그간 작가가 썼던 역사소설들과 다른 면이 많다. 먼저 이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나의 가족사와 현대사가 만나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면서 “이 소설의 ‘마동수’가 내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 1910년생으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중국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고 낭인 생활도 했다.
1948년 생인 작가는 3살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살았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가난과 폭력, 정치적인 억압이었다.
김훈 작가는 “내가 지금 70살이 됐는데 지금은 어떤가, 거기에서부터 발전했나,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라는 괴로운 질문을 하며 <공터에서>를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연말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공터’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은 공터로구나. 이 공터에서 뭔가를 만들어봐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제목을 정한 것.
자신의 작품과 문체 등 많은 이야기를 전한 이날 행사 말미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를 묻는 한 가장의 질문이 나왔다. 답이 인상적이었다.
“제일 좋은 것은 육체성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나는 놀이의 힘으로 자랐어요. 놀이는 육체를 쓰는 거거든요. 육체로 삶을 이해하는 것이죠. 요즘 아이들은 너무 육체를 안 써요.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간접적이고 추상적으로 밖에 체험을 못하거든요. 이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아이들에게는 소라껍질도 만져보고, 소나무도 만져보며 질감을 터득하라고 말했어요. 친구 얼굴도 직접 만져보며 육감으로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어요.”
디지털 시대가 될수록 그 역 방향, 즉 아날로그적 삶에 대한 향수는 더 커질 것이다. 아날로그가 우리 삶의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방향의 목표는 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삶의 육체성을 회복하느냐가 우리의 문제라는 게 작가의 시각이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을 묻는 독자에게 작가는 “모든 것을 잘 관찰해야 한다”며 “세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의문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꽃에 앉는 벌이나 나비, 그와 반대로 똥에만 가는 파리를 보며 “곤충들에게도 미의식이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모든 것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그것들을 모아 글을 쓰는 것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
강연 후 작가의 책에 싸인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이날 행사가 독자들에게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음을 말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