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소를 찾아 나서다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소를 찾아 나서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11.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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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원(이홍섭)은 강릉 사는 장돌뱅이로 제주도 서귀포에 가면 흰 소가 있어, 한 생을 신선처럼 살 수 있다는 소릴 듣는다. 목동 아해 다려 소 등에 올라, 피리 불며 백세주 빨며, 늙지 않고 산다기에 길을 떠나게 되는데... 다만 그 곳에 가는 열 고갯길이 험할 뿐 아니라,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세계사. 2005)으로 인하야 정신이 혼미할 수도 있다더라.

1. 소를 찾아 나서다(尋牛)

“異國種 당나귀의 귀가 순해지는 밤//오랫동안 헤매었던 사내의 몸에서/개울처럼 피가 빠져 나갑니다//영 너머 처녀무당은/역마의 피가 다 빠지고 나면/흰 당나귀 눈망울에서/싸래기눈 같은 꽃이 피리라 했습니다”(‘메밀꽃 필 무렵’)

2.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다(見跡)

“동자승의 손때가 묻은 작은 목탁 하나를 샀다/장사치는 대화면 산골짝에서 구했다며/唐詩集 한 권을 덤으로 주었다//그 옛날, 발길 끊긴 골짜기에서/누구는 어린 나이에 중이 되고/누구는 세상을 등진 채 唐詩를 읊조렸을 것이다//옆 좌판의 장사치는 숙취해소에 그만이라며/도암면 산골짝에서 갓 베어 왔다는 벌나무를 사라고 했다”(‘봉평장날’)

3. 소의 꼬리를 발견하다(見牛)

“복사꽃 피는 길이었지요//하늘을/하늘을 떠받치며 섰는/복상나무가/툭 툭 꽃을 던지는 길이었지요//망망대해 우에/망망대해를 향해/두 손을 모으고/자기를 사르는 바위가 있다기에/물어물어 가던 길이었지요//불이 휘듯/커브만 틀면 거기에 있다는데/있다는데/추암바닷가, 아궁이 같은 해변에 주저앉아/바다를 향해/불만 지피다 돌아오고 말았지요//사랑이 그렇듯/모든 사랑의 이별이 그렇듯/아궁이, 아궁이에/불만 때다 오고 말았지요”(‘추암 가는 길’)

4. 소꼬리를 잡아 고삐를 걸다(得牛)

“버려진 토종벌통 위로/무장무장 눈이 내린다//분주히 드나들던 꿀벌들은/돌아오지 않고//눈은 쌓여서/꾸역꾸역 입을 틀어막나니//이대로 이름 없는 부도가 되어/적막강산에 묻히면//너의 서러운 울음은/어느 골짝을 헤맬 것인가//눈사람 하나 천치처럼 웃고 있는/이 깊은 적막강산”(‘적막강산1’)

5. 소에 코뚜레를 뚫어 끌고 가다(牧牛)

“산 밑으로 이사와/빗소리 처음 듣는 밤입니다//갓 출가한 햇스님이/알머리를 숙이고 절마당을 쓰는 소리에/참 많은 것들이 쓸려갑니다//헤매고 헤매어도/비운다는 말/여직껏 믿지 아니하였더니//여기 이렇게 첫비가 내립니다”(‘첫 비’)

6. 소에 올라타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다(騎牛歸家)

“울지 마세요/돌아갈 곳이 있겠지요/당신이라고/돌아갈 곳이 없겠어요//구멍 숭숭 뚫린/담벼락을 더듬으며/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자수처럼/엉엉 울고 있는 당신//섬 속에 숨은 당신/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울지 마세요/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당신이라고/돌아갈 곳이 없겠어요”(‘서귀포’)

7. 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忘牛在人)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두고 온 소반’)

8. 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도다(人牛俱忘)

“없는 소를 내놓으라니/애가 타네/애간장이 다 녹네//빈털로 돌아가려니/마누라 보기 민망하고/마을 불빛은 꺼질 줄 모르네//소는 무슨 소/담벼락에 기대어 뒤돌아보니/내가 헤매고 다닌 산/한 마리/병든 소로 누웠네”(‘尋牛圖’)

9.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다(返本還源)

“당신에게 바칠 꽃이 다 떨어지면/여기 와 일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밤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듣다/아침이 오면 절벽 아래로 꽃처럼 피어날지도//당신에게 바칠 꽃이 다 떨어지면/깨끗이 저를 잊어주시길 바랍니다/내 마음 알 때쯤이면 당신도 정처 없이 이곳으로 흘러와/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헌화가’)

10. 지팡이에 도포 두르고 저잣거리로 나서다(入廛垂手)

“오동꽃이 왔다/텅 빈 눈 속에//이 세상 울음을 다 듣는다는 관음보살처럼/그 슬픈 천 개의 손처럼/가지마다 촛대를 받치고 섰는 오동나무//......//사방으로 날아가는 장작처럼/그 덧없는 도끼질처럼/나는 바다로, 깊은 산 속으로 떠돌았다//......//먼 곳에서 오동꽃이 왔다/갸륵한 신전이 불을 밝혔으니/너는 오래오래 울리라”(‘오동꽃’)

바다로 산으로 떠돌다 지쳐 쓰러진 자리에 오동나무 한그루 환하게 피었다. 이생원은 서귀포 절벽에 서서 바다소나무처럼 파도를 향해 등을 구부렸다. 어디선가 산까치가 깍하고 울었다. 이른 아침, 절벽 아래 무수히 피어난 꽃들, 얼음눈물같은 하얀 메밀꽃들.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에게 바치는 환하게 슬픈 헌화가.

(그림 = 정비파 판화작품 `황소의 눈`)[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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