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365-15,16]작가가 쓴 두 여행기 읽어보니...
[책읽기365-15,16]작가가 쓴 두 여행기 읽어보니...
  • 김지우기자
  • 승인 2009.01.29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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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김경주...사유-성찰 흥미로운 차이

[북데일리] 여행서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지의 독특하고 재밌는 정보? 맛깔스런 해설?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유와 성찰? 이 중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가 책을 내느냐에 따라 기대치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즉 '보통 사람'이 썼으면, 앞의 두 개 목적을 충족시키면 나름대로 성공이다. 그러나 작가가 낸 여행서라면? 당연히 후자를 기대하지 않을까.

이런 잣대로 볼 때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랜덤하우스. 2009)와 <패스포트>(랜덤하우스. 2007)를 동시에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두 책은 여행기이며 모두 작가가 썼다. 소설가 김영하와 시인 김경주. (공교롭게도 한 출판사로부터 나왔다. 그 사실을 지금 알았다.) 

김영하의 여행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다. 반면 김경주는 고비사막에서 시베리아를 여름부터 겨울에 걸쳐 다녀왔다. 목적지는 달랐지만 떠난 목적은 비슷해보였다. ‘나를 찾는 여행’이란 점이다.

데뷔 13년 김영하는 성공한 장편소설 몇 권을 냈으며, 국립 예술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라디오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 김영하의 삶은 이랬다.

'허둥지둥 학교로 향하고 저녁이면 방송 녹음을 위해 여의도로 향했다. 밤 11시 반에 집에 도착해 주차할 공간을 찾아 헤매야 했다. 틈틈이 연재소설을 써야 했고,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책을 통해 김영하는 이 상황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나를 잃어가고 있다’ 혹은 ‘내가 마모되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었다. 쉬익쉬익,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들렸다.] p21

작가는 '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이 모든 것들,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사항들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진단했다. 그리하여 2008월 밴쿠버로 '연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기까지였다. 초반부를 장식한 이 부분까지가 책의 하이라이트다.

사실 다음은 밴쿠버 이야기가 등장해야 옳았다. 그런데 책에 따르면 갑자기 일정에 문제가 생겼다. 밴쿠버로 들어가기 전 시간이 남았다. 두 달 반. 바로 이 기간에 시칠리아로 떠났다. 말하자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정작 시칠리아에서의 이야기는 평범한 여행기다. 책 제목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완 거리가 있다. 작가는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을 적은 마르코 폴로를 인용하며, 거기에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었다고 후기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 생긴 일'은 전자에 국한됐다고 봐야 옳다.

오히려 김영하 책의 제목은 김경주의 <패스포트>에 더 어울린다. <패스포트>는 여행지마다의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고비를 거쳐 시베리아로 가는 여정은 여행이라기 보다 고행이었다. 김영하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떠났다면, 김경주는 '있는 것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나는 어디론가 지금 여기를, 떠나보내야 한다.]p24

현실과의 이별. 그 의미에서 두 사람의 여행은 같다. 그런데 김경주의 경우가 좀 더 근원적이다.

[자신의 삶이 스스로에게 철저히 분실되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문득 여행을 결심한다. 무엇을 되찾고 싶거나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는 그 삶의 분실을 견딜 수 없을 때 구석에 박혀있던 가방은 다시 채워지게 된다.] p 36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욕조 하나를 보고 시인은 "이 황량한 사막과 욕조가 어울릴 수 있는 부조화의 감수성이 나를 설레게 한다."고 노래한다.

몽골 초원의 밤을 거닐며 "시간의 눈 안을 천천히 산책하는" 환상에 젖는가 하면, "몽골의 일몰은 멀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장 먼 곳까지 아득하다"고 토로한다. 달리는 시베리아 열차 차창에 펼쳐지는, 끝없는 자작나무를 보곤 한 편의 시를 쓴다.

"눈을 타고 내려온 자작나무들의 숲에선 인간의 발자국은 길을 잃는다. 발자국들은 인간의 시간에 뿌리내린 흔적이고, 자작나무의 발자국은 눈의 시간에 찍힌 것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열차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안고 달린다. 하바로프스크 역과 이르쿠츠크까지 장장 3,336킬로. 무려 62시간 동안 쉼표가 없다. 이어 도달한 겨울, 혹한의 바이칼. 시인은 그 풍광을 다음과 같이 '고혹적'으로 표현했다.

[인적이 없는 겨울에 바이칼은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동면에 들어간다. 나무와 숲, 호수, 바람, 산양, 그것들은 깨어 있지만 언 채로 살아가고 언 채로 자신의 고혹을 감당하고 있다.] p384

김경주는 "어쩌면 여행이란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가장 먼 장소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의 가능성일지 모른다."고 책을 통해 말한다. <패스포트>는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여행기, 그 매력의 진수에 모자람이 없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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