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희곡나라]불가사의 숍
[장정일의 희곡나라]불가사의 숍
  • 장정일
  • 승인 2009.01.05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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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행복 사고파는 자본주의 꼬집어


이윤설의 첫 희곡집 『불가사의 숍』(연극과인간,2007)을 재미나게 읽었다. 여기엔 2004년 신춘문예 등단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2005년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 당선작 「불가사의 숍」, 그리고 같은 해 거창국제연극제 세계초연희곡 공모 대상작 「해피 오 해피」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집은 위에 거론된 순서대로, 작가 특유의 능력이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분량만 따지더라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원고지 100매 가량이지만, 160매 분량의「불가사의 숍」을 거쳐 「해피 오 해피」에 이르면 200여매의 필력을 과시하게 된다(이 매수는 어림짐작이므로, 차이가 날 수 있다).


매해 양산되는 신춘문예 당선 졸작 가운데, 그나마 눈에 띄였던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가 이윤설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다. 문학사의 한 장면을 되새기게 하는 역설적인 제목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권력에 의해 전방위적으로 감시받는 ‘시민 노예’들의 마비된 일상을 보여준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백수, 쓸데 없는 고령자,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 그리고 플라톤이 건전한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 시인….
막이 오르면, “어디선가 본 듯 하고, 어디나 있을 법한 평범한 동네”의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 <새마을 노래>와 함께 “구민 여러분, 오늘은 쓰레기 분리 수거의 날입니다”라는 방송이 들린다. 그러면 구민들은 미리 입을 봉한 채 자루 속에 넣어 입구를 봉한 집안의 ‘잉여인간’들을 들고 나와 미화원들에게 넘겨준다.


작가는 ‘쓰레기 분리 수거’라는 은유를 통해, 무능력과 비생산을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제도와 권력의 전방위적 감시를 보여준다. ‘새로운 도시’는 오웰이나 푸코식의 자율 권력이 작동하는 도시며, 그런 도시에서 ‘시민들의 합창’은 억압에 대한 공손한 응대거나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2~5장 사이에, 재활용 개조소를 탈출한 4명의 저항을 작중에 삽입해 놓고 있지만, 그들은 가족의 고발과 협력으로 몽땅 체포된다.

확성기: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 셋을 셀 동안 자수하라. 하나!
백수 : 나는 쓰레기가 아니다!
마담 : 나도 쓰레기가 아니다!
곽씨 부: 나…나도다!
확성기 : 둘!
가족들 : 아버지! 아버님! 장마담!
백수 : 잠깐, 음악을 틀어다오! 신청곡 홀리데이!

음악, 비지스 <홀리데이>가 흘러나온다.

백수 : 동지들! 헤어질 때가 왔습니다.
마담 : 동지!
곽씨 부: 동무!

그들의 눈빛에 결연함이 감돈다. 음악 소리 점점 커진다.

백수 : 무전유죄 유전무죄!
마담 : 아 한 많은 이년의 팔자!
곽씨 부 : 나는 억울하다!
이씨 : 나는 살고 싶다.
확성기 : 셋!

암전

마지막 장인 6장은 다시금 울려 퍼지는 <새마을 노래>와 함께, 재활용 개조소에서 순치된 백수․마담․곽씨 부가 미화원들의 보조가 되어 등장하고, 일전에 이들을 분리 쓰레기로 내어쳤던 가족들과 구민들이 다른 가족과 구민들에 의해 분리 쓰레기가 되는 순환 구조로 끝난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강압적인 공권력이 아니라, 자율 권력과 위생 권력으로 위장되어 있는 작금의 권력 작동 방식을 얼핏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너무 빤한 소극(笑劇)으로 주제의 복잡성을 파헤치다 말았다. 그리고 작가가 활용한 지강헌의 <홀리데이> 일화는 시․소설은 물론이고 이미 영화와 연극으로까지 만들어 진바, 안이한 착상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로 소극으로 불리우는 파스(farce)는 ‘만두 속을 채우다’, ‘순대 속을 채우다’와 같이 ‘속을 채우는 것’과 상관된 용어다. 그것은 오늘처럼 전자 미디어가 없던 시절, 하루 저녁에 필요한 오락을 메운다는 뜻에서 ‘가벼운 연극’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극작술이기도 하고 배우의 연기술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 광대가 미끄러지면서 숙녀의 치마를 찢고, 그 탓에 숙녀에게 뺨을 맞은 맞고 반 바퀴를 돈 광대가 다시 숙녀의 남자 애인에게 주먹다짐을 당하고…. 이처럼 웃음의 연쇄적인 축적이 자동기술적으로 반복되는 게 소극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불가사의 숍」 역시 소극적인 분주함과 부조리극적인 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돈으로 행복을 사고 파는 자본주의의 진면을, ‘아이’를 사고 파는 은유에 담아 놓았다. 그러면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신의 아이’도 구해 올 수 있고(메니저 : 견습! 인류최초로 우리 가게에서 신의 아이를 입수했어!), 돈만 있으면 ‘신의 아이’ 살 수 있다고 덧붙인다(귀부인 : 우린 가족이 필요해. 제일 비싼 아기로 보여줘. 날개 달린 신의 아이면 좋겠는데. 인간의 아이는 모순과 부조리를 통해서 성장하는 바보천치들이니까. 그쵸 여보?).


마지막으로 읽은 「해피! 오 해피!」는 이윤설의 회심작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극에서 종종 간과되곤 철학적 깊이에 다가간다. 막이 오르면, 소장과 견유학자(견유학자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개다)가 지키고 있는 황량한 사막 속의 분실물 센터로 부인․교수․경찰․도둑이 차례로 찾아 온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열거된 차례대로 사랑․용기․믿음․소망. 하지만 이들의 진짜 목적은 제각기 잃어버렸다는 사랑․용기․믿음․소망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이 보관소에 “알렉산더 대왕이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걸 훔치러 온 것이다. 그러면 알렉산더 대왕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통 속의 철학자 디오니소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조우를 떠올려 보라면 도움이 될까?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불가사의 숍』에 실린 세 작품은 현실에 대한 개괄적인 파악은 능하지만, 개괄 이상의 분석이나 현실을 돌파하는 사유를 보여주진 못한다. 그런 원인을 이 작품들이 분류될 ‘희극’ 장르와 순환 구조에서 찾는 다면 답이 될까? 희곡쓰기에서의 순환 구조는 무난한 완결이 담보되기 때문에 자주 남발되는 작법인데다가, 순환 구조 자체가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고 있기에 어떤 결말에서는 끝내 양보하기 힘들다. 그러면 ‘희극’ 장르가 『불가사의 숍』의 모든 한계를 뒤집어 써야 하는가? 이 대목은 다른 기회를 빌어 재론하고자 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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