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파병' 악몽은 700년 전에도 존재
'월남 파병' 악몽은 700년 전에도 존재
  • 김대욱 기자
  • 승인 2008.11.20 0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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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전쟁의 본질은 늘 똑같아

[북데일리] 월남전은 ‘남’의 전쟁이었다. 한국은 '별 볼일 없이' 남의 전쟁에 끼어들었다. 약소국가 처지로 보면 우리는 미국보단 월남과 가깝다. 그럼에도 미국을 등에 없고 총을 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참전 연인원 32만 5517명 중 5099명의 젊은이들이 죽었다. 부상자도 1만 1천2백여명. 운 좋게 살아 돌아왔더라도 고엽제 후유증 같은 후폭풍에 시달려야만 했다.

남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피를 본 이같은 상황. 알고보면 우리 역사에선 처음이 아니다. 전쟁사 전문가인 서영교 박사는 신간 <전쟁 기획자들>(글항아리. 2008)에서 약 700년 전에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고려 원종 때 일. 당시 원종은 무신정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몽골의 일본 파병 제안을 받아들였다. 쿠빌라이칸과 사돈을 맺기 직전인 1270년 고려는 전쟁 준비를 본격화했다.

먼저 필요한 건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배였다. 고려는 300척의 배를 만들었고, 그 탓에 마산만 주변의 모든 산들은 알몸이 됐다. 고려인 장정 8000명과 뱃사공 6700명도 동원됐다.

1274년 10월 3일 병사들은 몽골, 고려 연합군은 일본으로 출격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대마도와 이키 섬을 점령하고 하카다만(후쿠오카)에 닻을 내렸다. 일본군과 한바탕 싸움을 치른 후 저녁이 되자 연합군은 배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무시무시한 태풍이 몰려와 배를 암초와 해안에 내던졌다. 이 때 연합군 1만3000명이 그대로 물귀신이 됐다. 이런 태풍에 의한 참사는 2차 침공 때인 1281년에도 있었다.

700년 간격으로 벌어진 파병의 악몽. 하지만 악몽 덕에 단꿈도 꿀 수 있었다. 한국은 월남전 파병을 계기로 경제발전이 가능했다. 1966년 파월 장병이 국내로 송금한 직접 수입액은 1억 7830만 달러였다. 민간 파월 기술자가 송금한 수입액은 6억 742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당시 국내 총 외화 획득의 80%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고려 역시 파병으로 큰 소득을 얻었다. 1274년 몽골은 소와 군량을 징발한 대가로 각각 명주 1만 2350필과 3만 3145필을 고려에 내줬다. 1280년에는 명주 2만 필을 추가로 보내 군량을 보충하게 했다. 1291년에는 고려에 기근이 들자 안남미 10만 석을 원조했다.

이런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서 씨는 인류 역사에서 전쟁의 본질은 늘 같다고 말한다. 민족과 국가를 위한 전쟁은 없고, 전쟁은 시장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이 있는 한 전쟁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전쟁이 시장이란 자궁에서 배태되었을 때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괴물이 된다. 또한 그 전쟁을 이끄는 ‘전쟁두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민활하고 창조적이다. 그들은 불가능한 시장을 만들어 시장의 주인이 된 자들이다.”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아닌 시장을 중심에 두고 전쟁의 본질을 꿰뚫는 저자의 시도가 신선하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오가며 각 전쟁간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작업 또한 흥미진진하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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