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허망함을 쓰다듬어 주는 소설
내 허망함을 쓰다듬어 주는 소설
  • 북데일리
  • 승인 2008.06.1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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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대학생 독서진흥을 위해 책 뉴스 사이트 `북데일리`는 숭실대의 `독서후기클럽`을 적극 후원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여덟 번 째 책 `그 산이 정말 거기있었을까`(박완서, 웅진닷컴)에 대한 최우수 서평입니다.-편집자

자분자분한 말투가 연상되는 작가, 적지 않은 나이에 등단한 작가이며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작가, 박완서.

그의 작품 중 소설은 최근에 나온 단편집 `친절한 복희씨`가 처음이고 줄곧 산문집 위주(`호미`, `잃어버린 여행가방`, `두부`등)로 그와 만났다. 후기 클럽을 통해 읽고 싶었던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게 되었다.

그의 산문집은 마치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할머니가 예전에 이런 일을 겪었었지.”라며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은 친근하고 그래서 정이 느껴지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소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두근거리게 하는 짜릿한 연애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흥미진진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는 자꾸 읽고 싶고 “다음은? 다음은?” 이러면서 재촉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자전적 소설이라 그런지 산문집에 등장했던 사건들과 인물들이 재차 등장하였다. 나는 그들이, 그 사건이 소설에 나올 때 마다 시기상으로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먼저지만 ‘아, 반가워요. 여기서 또 만나네요.’라며 아는 척 할 수 있는 반가움이랄까, 그런 공감이 형성되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한국전쟁이 플롯의 중심 사건이 되는 소설이다. 피난을 가고 오고 그 와중에 친오빠를 잃게 되고 떠밀리듯 가장이 되어 직장을 다니다 결혼을 하는, 생각만으로도 참 우여곡절이 스무 고개 쯤 될 것 같은 5년 남짓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 나간다.

사고라도 한번 당하고 나면 그 때의 상황과 심정에 각색을 더해 그럴싸한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이다. 마치 남들은 겪어 보지 않은 일을 혼자만 겪은 듯이 열변에 가깝게 말이다.

박완서는 인생에서 가장 미치도록 싱그러운 20대 초반에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파란을 겪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때를 이야기하는 그는 바람이나 들으라는 듯 조용히 수선스럽지 않게 ‘시침 뚝 떼며’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가 없어서 태산 같은 울음’처럼 들렸다.

나에겐 할아버지가 안 계시다. 한국전쟁 당시 군인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기일이나 현충일에 국립묘지 참배하러 갈 때, 스치듯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날을 이야기해주시곤 했다.

때가 되어 막 밥 한술 뜨려는데 동네 어른이 공터로 모이라고 불렀단다. 밥이나 한술 뜨고 다녀오라는 할머니의 말에 금방 다녀와서 먹을 테니 치우지 말라며 손을 흔들고 대문을 나가시던 그 모습의 할아버지가 마지막이란다. 그렇게 징집되었고 돌아오지 못하셨단다. 그때 나의 할머니는 스물다섯이었고, 아버지는 4살, 작은아버지는 아직 태아였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안타깝게 떠나고, 할머니는 가슴 아프게 남겨지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슬프게 자랐다. 그때를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슬프지도 쓸쓸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어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요즘은 그때 이야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여쭈어 보아도 “이젠 기억도 안나.”라며 딴전을 피우신다. 왜 기억이 안 나겠는가. 작가 박완서는 어머니, 올케, 조카, 숙부와 함께 그 시절을 함께 보냈어도 두둑한 책 한권이 써질 만큼 절절히 남은 기억인데, 과부가 두 아이와 피난을 다니고 양육하면서 남편을 기다렸을 시절이 잊혀질 리가 있을까.

소설 속 올케가 ‘입으로 검둥이 받는 양갈보’와 함께 먹은 양푼 비빔밥처럼 ‘속이 느글거리게 제대로 얹힌 점심’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마치 내 할머니가 내게 그 시절을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더욱이 박완서가 피난을 다닐 때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는 파주 탄현의 구렁재 언저리가 바로 내 할머니가 한국전쟁 당시 사셨던,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다.

수더분하고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를 지닌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박완서 역시 할머니처럼 시침 떼면서 묻는다.

“내가 넘었던 힘들었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잿더미 사이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목련을 보고, 돈암동 어귀에 빽빽이 핀 백목련을 보고 ‘얘가 미쳤나봐.’라는 비명을 저지르고 싶을 만큼 ‘벨 숭악한 세상’이었던 그 시절을 ‘온몸을 내던진 울음’으로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처럼 의연하게 견디며 살아온 그들에게 배워야겠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힘듦은 나중, 나중에는 그때 그게 산이었나 싶을 정도로 낮은 중턱일 뿐이라는 것을. 물론 그네들이 겪었을 ‘세월의 부피, 경험의 부피’와 지금의 내 불안한 성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지만 그들처럼 내 인생도 살아가는 게 아닌, 물 흐르듯 살아질 것이다.

나름 굴곡이 많고 힘든 삶이라고 주저앉은, 눈물이 날 것 같은 지금의 내 허망감을 박완서는 자분자분 위로한다. ‘내 손은 약손’같은 소리와 함께 ‘모든 건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라면서.

내게 있어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조카 현이의 병을 낫게 해준 구렁내 호랑이 할멈의 ‘귀한 영사’같은 소설이었다. [우은영-숭실대 국어국문학과]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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