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시편지]굴뚝청소부, 악공을 노래하다
[최창근의시편지]굴뚝청소부, 악공을 노래하다
  • 북데일리
  • 승인 2008.05.2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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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랜덤하우스, 2008)

아이들이 천문대로 기어든다 나란히

돔 천장을 밝히는 별자리 유성이

긋는다 아이들의 재잘거림 사이

천문학자는 커피잔에 별을 굴린다

스푼 끝에서 빛이 흔들린다 가느다란

어둠 속으로 하얀 오리 알이 미끌린다

끄을음 앉은 구름이 갈라터진다 발전소

첨탑 위로 풍선이 솟구친다

배관공이 떨어진다

모터가 멎는다

굴뚝청소부는 4월의 잔설(殘雪)로 몸을 닦는다

- 신동옥, <굴뚝청소부> 전문

제 1부 영혼은 깃발로 가득하다 - 빅토르 하라

[북데일리] 악공이여! 짙은 안개와 잿빛 풍경으로 스산하던 그리스 북부를 지나 터키 국경을 넘은 기차는 이튿날 새벽 이스탄불 시르케지 역에 도착했소.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의 무대가 됐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종착역 말이오.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와 뮌헨,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헝가리 부다페스트,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불가리아의 바르나를 거쳐 이스탄불에 이르는 80시간의 초호화 여객 열차였던 오리엔트 특급은 지금은 옛 영화 속에서 화려한 추억과 낭만으로만 남아 있소.

오랜 바닷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빛바랜 역사를 돌아보며 여행자는 그리스 노래 <포도주 한 잔>의 일부분을 입속으로 중얼거리오. “나에게 포도주 한 잔을 가져다주오. 그리고 나와 잠깐 머물러 주오. 내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오늘 저녁이 나의 마지막 바람이오. 내 생애는 전부 타락하였소. 이 생을 나는 떠나고 싶소. 삶이 약속한 황금 궁전. 그 궁전은 덧없을 뿐이라오.”

여행자는 동북아시아의 남루하고 초라한 작은 땅, 그곳에서 가져 온 시집을 펼쳐 드오. 펼쳐 든 시집 안에서 <사육제의 나날>과 <사순절의 나날>, <올드 블랙 조>와 <작은 보석상자 안의 토종어들>을 발견하오.

먼 옛날 ‘아쉬크(음유시인)’에 의해 내려온 음악, 갈대피리 ‘네이’의 노래는 신비롭소. 신비롭고 환상적이오. 노래가 소리요, 소리가 노래요.

제 2부 그가 죽자 서서히 생명선이 지워졌다

악공이여!

여행자는 이곳 톱카프 궁전에서 모세의 지팡이와 다윗의 칼, 아브라함의 이를 보았소. 돌마바흐체 궁전에서는 오스만 제국 시절 왕비와 궁녀들의 처소였던 하렘도 구경하였소.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술탄 아흐멧 자미와 성소피아 성당으로 알려져 있는 아야소피아 성당 그리고 늦가을의 정취를 호흡하고 싶게 만드는 귤하네 공원의 고목나무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이자 빼어난 음악이었소.

13세기의 나스레틴 호자, 14세기 카라괴즈의 해학은 13세기 유누스 에므레의 철학과 15세기의 쾨로울루의 시와도 통하오. 당대 영웅의 모험담은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귀환하고 그 간결하고 순수한 사랑만큼 저속하기 짝이 없소. 어느 날 영민한 과학자 첼레비는 밀랍으로 이어붙인 거대한 독수리 깃털을 달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횡단했다고 하오. 저무는 석양 속에 잠겨가는 몽환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의 고독을 헤아려보오. 참 의미심장하지 않겠소. 외로움은 그런 종류의 것이오.

위대한 술탄 슐레이만도, 오스만 제국 최초의 황후 휴렘도, 건축가 미마르 시난도, 해군제독 바르바로사와 투르굿 레이스도, 대재상이었던 이브라힘 파샤와 소콜루 메흐메드 파샤도 다들 외로워서였소. 한 줌의 노래는 또 그런 것이오. 당신의 ‘심금(心琴)’과 ‘지음(知音)’도, ‘만년 후’의 ‘악공을 위한 묘지(墓地)’와 ‘우주(宇宙)’도 그런 것 아니겠소.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늘 쓸쓸하기 마련이라오.

제 3부 모든 영혼에는 파수꾼이 있다 - 코란

악공이여!

에게 해의 바닷바람이 뜨겁던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과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 메테오라는 터키 건축의 옥외미술관인 샤프란볼루와 흑해 연안의 작은 항구 아마스라의 경이로움으로 한 단계 올라갔소. 빛은 춤추듯 사람들 속으로 밀어닥쳤소. 여행자는 그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좋았소.

하루해가 뜨고 질 때까지 자미(사원)에서 흘러나오는 코란의 독송은 뭇 여행자들을 홀리게 하오. 그 속에 <지구본 돌리는 밤>이 있을까? <아비 정전(正典)>을 흐느끼는 밤 또한? <비 오는 날>이면 <성묘> 가서 깨닫는 <Sorrow>마저? 굴뚝 청소부의 영혼은 두 팔 벌리고 하늘 향해 솟구쳐 오르고 싶어 하오. 단지 그것뿐이오.

빛의 구도자이자 예지의 순례자로 불렸던 한스 카로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겠소.

끝이란 없는 것

불타오르는 섬김이 있을 뿐

무너지면서

우리는 빛살을 내 뿜는다

- 한스 카로사, <비밀> 중에서

* 편지 왔어요-답신 4 *

몇 해 만이었나

그 불을 다시 본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똑같은 기적이 이 작은 마을에서도

일어나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이 붙기 전

한 장의 편지도 없이

내 곁을 떠난

소금기 많은 그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첫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당신이 그리던 추억의 불이

내 가슴속에 바람처럼 활 활 타오르고 있었음을

정월대보름 긴긴밤을 밝히며

오늘밤 저 때 묻은 코흘리개 아이들이 돌리는

보름달 비행접시에도 알알이 박혀 있었음을

달님이시여, 달님이시여

오래된 이 슬픔을 빈 깡통에 담아 드립니다

올핸 내게도 볏짚처럼 부드러운

단단한 樂器를 내려주세요

- <불꽃놀이> 전문

[극작가 최창근 anima69@empal.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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