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망을 꿈꾸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망을 꿈꾸며
  • 북데일리
  • 승인 2008.05.16 0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데일리] 지난 해 대통령 선거는 보수진영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지난 4월 9일 치러진 18대 총선에서도 범보수진영이 차지한 의석수는 200여석을 훌쩍 뛰어넘는다. 세계적인 보수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사회의 보수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바야흐로 보수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진보 진영이 유행 지난 민주와 운동의 낡은 기억을 재래시장의 좌판에서 팔고 있을 때, 보수는 세련되고 편리한 대형마트를 짓고 미래를 세일하며 손님들을 불러 모았다. 진보의 보부상들이 80년대의 등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고 있는 사이, 보수의 자본은 질 좋고 풍부한 물산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보수가 전망을 팔고 진보가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뒤바뀐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한 때 현실의 고통을 견디도록 꿈이 돼주었던 진보의 가치는 빛바랜 사진첩의 얼굴들처럼 누렇게 색이 변했고, 지난 시절 혐오스럽던 보수의 몰골들은 어느새 반듯한 신사의 풍모를 풍기며 더 없이 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긴다.

세월은 변했고 시절은 지나갔다. 변혁의 기운은 기성(旣成)의 안주(安住)로 소멸되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진보와 보수가 쟁패하던 광장에 정신은 사라지고 물신만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진보의 상품을 찾는 손님이 사라진 이때에 영 팔리지 않을 진보의 가치를 팔아보겠다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진보의 과잉’이 아니라 ‘진보의 과소’로 고통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나선 이가 있다.

서울대법대 교수인 조국이 그 주인공이다.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기치로 진보의 위기는 곧 기회라며 ‘더 낮은 곳으로 임하라’고 어설픈 진보들의 졸렬한 행보를 질타하고 나선 것이다.

<성찰하는 진보>(지성사. 2008)의 저자 조국은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또는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낡은 구도를 버리지 못하고, 대중의 상태와 감각에 무지하거나 무감한 채, 낡은 축음기로 흘러간 옛 노래 음반을 돌리고 있는 진보는 ‘수구․무능좌파’라는 욕을 들어도 마땅하다”고 일갈한다.

그에게 있어 진보의 몰락은 다른 누구 탓도 아닌 진보진영 스스로가 초래한 당연한 귀결이다.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진보”에게 미래란 없는 것이다.

“‘보수의 시대’가 열렸다는 팡파르가 울리는 시기에 진보의 가치가 대중과 재결합하기를 꿈꾸는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돈키호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꿈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삶은 천박․저열해지고 우리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꿈을 나누고 공유하면 언젠가는 현실로 전화(轉化)하며 일상의 삶을 바꿀 것이다. 사실 모든 변화는 꿈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서문 중 )

그의 고백처럼 그는 돈키호테 혹은 시절 모르는 이상주의자인지도 모른다. 미디어를 통해 보게 되는 그의 면모에서 사노맹 사건의 수인 시절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처럼, 그러나 세상의 진전은 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이면의 작은 파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역사가 늘 햄릿보다는 돈키호테 같은 이들에 의해 발전하고 진전되어 왔듯이 우리가 꿈꾸지 않는 한, 우리에게 전망이란 요원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무엇보다 ‘성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막스 베버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요구한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 말은 비단 정치인의 소명의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절차적 민주주의와는 별개로 여전히 20대 80의 경제적 실질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우리사회에서, 특히나 기성의 틀 속에 편입되어 버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꿈꾸고 실질적 개혁의 장도에 나서야 한다.

책은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삶을 위해 진보는 무엇을 성찰하고 꿈꾸어야 하는가? 우리의 피눈물을 닦아 주었던 진보의 열정과 희망은 지금 어디를 표류하고 있는가? 성장제일, 효율만능을 외치는 우리 사회는 지금 ‘진보의 과잉’인가 ‘진보의 과소’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성찰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백범의 진정한 보수를 이제라도 배워야 하고 몽양과 죽산이 남기고 간 그 아름다운 꿈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꾸어야 한다. 박정희를 비롯한 개발독재의 신화 속에 감추어진 허상을 바로보고 그들에 의해 처참하게 찢겨진 인간다움의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맘몬’들을 통제하지 못할 때,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이 우리 모두는 우중(愚衆), 심지어는 거짓에 혼을 판 맹중(盲衆)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계해야 한다.

이 시대의 소수자 인권은 다수자의 이익에 관계없이, 일정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지켜야 하는 가치이다. 아직도 가부장적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여성의 정치․사회적 자리는 취약하기 그지없다. 나머지 반이 아니라 반을 합쳐야 온전한 일이 되는 것이 세상의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사법개혁과 학문과 대학의 개혁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남북의 문제는 우리의 생존권과 직결된다. “평화와 교류를 위해서 연북(聯北)하면서도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비북(批北)해야 한다”고 저자는 목청을 돋운다.

달려라, 로시난테!

미국과의 굴욕적인 쇠고기 협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현실에서 책 속에서 듣게 되는 백범 선생님의 말씀은 절절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진보며 보수가 어디 따로 있을까. 죽산의 육성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를 숙연하게 하고 부끄러움으로 숨고 싶게 한다. “남북의 평화통일, 수탈 없는 경제체제, 혁신정치의 구현”을 외치며 진보정당을 창당했던 죽산의 꿈은 여전히 꿈으로만 남아 있다.

동서냉전이 사라진 지금에도 남북의 대결을 선동하는 세력은 오히려 기세등등해지고 “법은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 또한 매일 자살을 결심해야 하고 비정규직의 설움을 곱씹어야 하는 농민과 노동자는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부”어야 한다.(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중) “이러다간 오래 못갈” 세상에 정치의 후진성은 그대로 절망이다.

그렇다고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부조리한 세상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 우리에게 선택이란 살아 내는 것이다. 이문열 식으로 말하면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하”는 것이다.(‘젊은 날의 초상’ 중에서) 그러기 위해서 저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매일 꿈꾸어야 하”고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존이구동(存異求同)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저자는 그것이 성찰이며 진정한 의미의 진보라고 우리를 깨우친다.

“세상은 구호나 설교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성찰과 설득으로 바뀌는 것이며, 자신의 이념과 정책의 올바름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구차스럽게 따르지도, 구차스럽게 침묵하지도 않겠다”는 저자의 다짐은 책을 덮은 지금에도 귓가에 생생하다. 가슴 속에서 파문처럼 번진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저와 같다면 분명 세상은 진전될 것이며 꿈은 현실이 될 것임을 필자는 믿는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어느 용사도 감히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고,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으려 하는 것이 진정한 기사의 의무, 아니 특권이다.”라는 돈키호테의 호언이 저자의 가슴을 언제나 뛰게 하듯, 책의 말미에서 저자의 시간까지를 알게 된 우리 역시 돈키호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책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인용하여 그 박학을 드러냈듯이, 필자는 저자의 돈키호테에서 르네 지라르의 <매개된 욕망>을 닮아 흉내 내는 열정을 찾고, 루카치의 <별>을 보며 가는 이들처럼 다시 사막을 건너갈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볼 수 있는 한, 우리는 사막을 건널 수 있다. 주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달려라, 로시난테!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빠르지 않게, 반쯤 빠르게.” (본문 중)

[임흥재 시민기자 epogue21@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