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쌤의논술돕는책] 속독 시대에 지독이 필요한 이유
[신쌤의논술돕는책] 속독 시대에 지독이 필요한 이유
  • 북데일리
  • 승인 2008.04.0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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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지난 번 고종석 칼럼에서 난독증 비스무리한 것을 느낄 때 고종석의 글을 읽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을 느낀다고 했다. 정말 읽고 싶지 않은 글들을 직업 관계상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할 때가 많다. 대개 교육서, 학습법, 합격 수기들이다.

목차는 물론 내용도 비슷하고 구사하는 문장도 대동소이하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목차만 봐도 뻔히 드러나는 책들이 많다. 필자도 그런 류의 학습서를 여러 권 냈기 때문에 제 얼굴에 침 뱉기가 되겠지만 이런 책들은 정말 읽기가 싫다.

그래서 필자가 선택한 방법은 속독이다. 간간히 새롭다 싶은 부분(주로 사례들이다)만 집중해서 읽고 나머지는 발췌독을 한다. 제목과 제목 사이를 키워드를 중심으로 대충 읽으면 30분이면 책 한 권 읽어낸다. 30분을 투자하든 3시간을 투자하든 읽고 나서 남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저자 입장에서는 준비하고 쓰는 데 최소 몇 개월이 걸렸겠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30분이면 책에서 건질 건 다 건진다는 이야기다. 사실 완독 여부가 독서의 본질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대충 훑어보거나 흘낏 제목만 보고도 그 책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피에르 바야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완독해야 할 가치가 있는 책들은 고종석이나 고미숙, 남경태, 박노자처럼 문장이 뛰어난 이의 글이다.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의 글은 씹는 맛이 있다. 안광이 지배를 철할 정도로 정독을 해야 한다. 글을 끌고 가는 힘과 문장 속에서 리듬감과 속도감이 살아 있어 자연스럽게 몰입이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속도도 빨라진다. 처음에는 지독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속독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이다.

읽히는 맛은 요리(글쓰기)에도 도움이 된다. 이들의 글을 읽고 그들의 생각과 문장에 대한 기억을 서평으로 정리하기 이상의 글쓰기 연습은 없다. 필자의 체험에 의하면 속독과 정독은 독자의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 필력의 문제다.

속독일까, 아니면 정독이 답일까? 오늘 소개할 책은 그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는 독서법 책이다. 일본 현대문학의 기수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 2008)이다. 그는 23살에 일본 최고의 문학상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한 천재 작가다.

히라노는 이 책에서 속독은 잘못됐고 슬로 리딩 혹은 지독이 제대로 책을 읽는 방법이라고 단언한다. 속독의 종주국인 일본에서 이런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 다치바나 다카시를 비롯해서 일본에서는 속독 예찬론자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히라노는 한 달에 책을 백 권 읽었다느니 천 권 읽었다느니 자랑하는 사람들은 라면 가게에서 개최하는 빨리 먹기 대회에서 십오 분 동안 다섯 그릇을 먹었다고 자랑하는 사람과 뭐가 다르냐고 반문한다.

히라노가 속독이 위험하다고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속독을 하면 오독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단다. 책 속의 다양한 장치나 의미심장한 구절, 절묘한 표현 등을 모두 놓쳐버릴 가능성이 크고 단지 읽었다는 사실만 남기 쉽다.

독자의 기억에 남는 건 독자에게 중요한 말일 뿐이지, 문맥상 작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말은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독서법이 지속된다면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닫힌 사고만 반복되고 시야가 넓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편협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실제 필자의 경험으로도 그렇다. 타고나거나 아주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글을 읽는 속도와 이해력이 반비례하게 되어 있다. 특히 사상서나 철학서 그리고 소설처럼 저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벼려 낸 사고의 산물일 경우 속독이 더욱 위험하다. 이들 책들을 매뉴얼이나 신문 찌라시 광고 읽듯이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면 어떻게 읽는 게 제대로 된 지독일까? 조사와 조동사를 중심으로 읽자. 속독은 동사와 명사 등 단어 중심인 반면 히라노가 고집하는 지독은 조사 읽기에 공을 많이 들인다.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와 ‘나는 사과를 좋아하기는 한다’의 뉘앙스 차이를 알아야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며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리고 수시로 앞 페이지로 돌아가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자고 주문한다. 요즘 워킹 메모리라는 말이 유행인데 그에 따르면 인간의 워킹 메모리는 정보를 조금씩밖에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속독으로 대량의 정보를 입력시키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슬로 리딩으로 잘게 나누어 그때마다 장기기억과 단기기억 사이를 왕복하면서 정보를 처리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독을 위해 음독보다 묵독을 권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와 저자의 의견은 갈리는데 필자는 음독 예찬론자다. 필자는 음독함으로써 뇌의 전두부가 활성화되어 사고력과 의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신봉한다.

하지만 저자는 잘 읽는 것(발음)에 집중하다보면 내용에 대해 주의력이 산만해진다고 보고 있다. 저자와 필자가 만나는 대목은 설명을 머릿속에서 하며 읽기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것을 상정하고 읽는 것도 이해력을 높이고 기억에 오래 남는 슬로 리딩의 유효한 기술 중 하나다. 읽은 후에 누군가에게 설명할 것을 전제로 책을 읽으면 잘 모르는 부분은 다시 읽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이해력도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히라노는 여러 가지 기호를 사용해 책을 차트처럼 꾸미라고 하는데 이 주장도 필자는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저자는 속독을 라면이나 짜장면 빨리 먹기 기술처럼 폄하하는데 필자는 한국적인 특성상 속독이 어느 정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언어 영역 시험과 공무원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에 한해서다. 언어 영역 시험에서 지문이 길고 많기 때문에 시간의 부족을 느끼는 수험생들이 적지 않다. 중하위권에선 속독 훈련을 통해 언어 영역 점수가 올라가는 효과를 본 학생들이 꽤 있다.

하지만 논술에서는 속독이 그다지 효과가 없다. 오히려 히라노가 사용하는 슬로 리딩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히라노의 독서법 중에서 논술과 언어 영역 모두에 도움이 되는 지침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히라노는 시험 볼 때 본문과 문제를 하나의 연속된 문장으로 보고 읽으라고 주문한다. 철저히 출제자의 시점에서 시험 문제를 읽어가다 보면, 어떻게 답을 써야 할지가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논술 시험에서 제시문과 논제를 읽을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 신진상 sailorss@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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