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한국소설] 응원 없는 날들의 일기
[내사랑한국소설] 응원 없는 날들의 일기
  • 북데일리
  • 승인 2008.03.3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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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대한민국 땅에서 취업을 못하고, 결혼도 안하거나 못하고, 능력이나 외형적인 것들이 평범한 (그래, 모자람이 아닌 평범한) 여자가 서 있을 곳이 있는지 어디 둘러보자. 게다가 그 불리한 조건을 완벽히 갖춘 상태에서 서른 살이 넘었다는! 조건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짓밟히게 만든다.

그래서 어느 가수도 그냥 대한민국이 아니라 아! 대한민국 이라고 불렀고, 숨 막힌 젊음들은 한 번에 외칠 힘이 모자라 대~한민국 이라고 외쳤나보다.

차라리 중동 건설현장이나 베트남 전에라도 나갔던 옛사람들은 힘겨웠어도 응원이나 받았지, 매일 무너지는 모래성을 쌓고 취업전쟁 속에 있는 젊음들은 격려는커녕 수모의 대상이다.

열명이 응시해서 아홉 명이 합격하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열 명중 한명도 겨우 합격하는 세상이다. 잘못한 당사자들은 뒷짐 지고 있는데 우리의 젊음들은 구조적 결함도 모두 개인적 ‘실패‘로 떠안았다. 한명만 원하는 세상에서 나머지 아홉 명은 죄인이다.

세상이 지금당장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있는 ‘나머지’들의 일기를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창비 2008)에서 읽는다.

1. 한 걸음 - 상실로

낭만의 정점 크리스마스이브에 애인과 헤어진 연수는 며칠 후 서른세 살을 맞았다. 나이 한 살 더 먹은 기념으로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회사까지 그만두었다. 흔히 말하는 백조의 조건을 다 갖춘 거다.

연애도 회사도 없어지니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사람은 어딘가 가있어야 존재의 위안을 받나보다. 애인과 헤어졌음을 안 식구들이 ‘이 나이에’ 헤어지면 어떡할 거냐고 정색을 하는 마당에 회사까지 그만두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한다.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왔지만, 안과 밖의 균형이 깨어진 생활에서 방은 결코 아늑한 공간이 되지 못한다. 연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넘어진 김에 새로운 목표점을 하나 찾아보자며 영화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2. 두 걸음 - 슬픔으로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고 엄마는 갱년기를 맞는다. 이렇듯 모든 사람들에겐 자기 나름의 새 세상이 열린다. 열심히 달려오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에 모두 당황한다.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노래하면서 울먹이고, 엄마는 대학교수로 사회활동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후 스스로 뭐하며 살았냐며 자책한다.

울음은 절망의 다음 걸음에서 나온다. 울지 못하면 병이되지만, 울 때 치유는 시작된다. 울음은 상실의 자리를 위안으로 채우는 도구이다. 당신이 울 수 있다면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아직 쿨한 걸음은 아니더라도.

연수 또래들 사정도 다양하다. 특히 그 나이의 여자들에게 결혼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학생시절 가장 유망했던 친구가 초라하게 살아가기도, 책상대신 화장대에 앉아있던 친구는 결혼 후 재테크에 눈이 밝은 어른의 세계로 편입되기도 한다. 남들 다하는 자연스런 편입과정에서 탈락된 슬픔이 연수를 덮고 있다.

3. 세 걸음 - 격전지로

스무 살은 엄살이고 서른 살은 결전이다. 스무 살은 형이상학과 유심론의 의자에 앉아있지만, 서른 살은 형이하학과 유물론의 지뢰밭을 걷고 있다. 스무 살의 마음은 마음과 싸우기만 하면 되지만, 서른 살의 마음은 마음과 싸우면서 동시에 물질과도 싸워야한다. 거침없이 후회해도 좋을 시기를 지나 이 때는 후회의 수도꼭지도 최대한 힘을 줘서 잠가야 할 시기이다. 복잡한 서른 살이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도서관에서 매일 읽고 쓰기를 하던 연수는 대학동기 동남을 만난다. 원하지 않은 시간을 많이 살아온 동남은 부모의 기대에 이미 많이 어긋나 있었지만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동남이 던진 말은 이 시대 젊음들이 지닌 고뇌의 핵심을 안고 있다.

“솔직히 이제는 내가 다닌 데가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때는 사회구조가 이상한 듯도 느껴지다가, 또 어떤 때는 정말 주변 어른들의 말처럼 자신이 결함투성이의 사람인 듯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 둘 어떤 것이든 젊음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연수는 직장에서 밀려나고, 동남은 짧은 직장생활에서 월급만 떼였다. 한 번의 승리도 없었고, 주변의 지탄이 탄환이 되어 계속 날아오는 서른세 살의 격전지에서 동남은 비극적 결말을 선택한다.

어떤 세상의 매몰찬 배신도 연수는 견뎌야 한다. 앞날이 불투명 하다못해 깜깜하던 친구가 어느 날 잘나가는 남자와 결혼선언을 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사촌의 윤택한 결혼생활도 받아들여야 한다. 서른셋이 마주한 세상은 시시콜콜하게 시비를 걸어온다.

4. 다시 한 걸음 - 쿨하게

각자 문제를 가진 가족 구성원들이지만, 둘러앉은 식탁에서 들리는 수저 딸그락거리는 소리는 서로에게 위안을 준다. 눈물겨운 식탁이 있으면 바깥세상에서 울지 않아도 된다. 가족도, 밥상도, 캐러멜라떼 한잔도, 모두 ‘참으로 삶의 한가운데 있는 존재’들이다.

연수는 그것들의 따스함에 힘입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삶은 어떤 것에 대한 명확한 성취가 아니라, 자신이 다다르고 싶은 것과 지금 발 디딘 곳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걸음걸이임을. 그리고 다짐한다. “절대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막을 내리게 하지는 않을”(p.252) 거라고.

서른 즈음엔 "별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이 저 혼자 열"(p.22)리기도 한다. 땅에서 허공으로 미처 준비되지 못한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다른 세계의 열림은 두렵기만 하다. 20대에 익어왔던 젊음의 열매는 비바람을 견딜 정도로 단단한 껍질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젊음이여 걱정 말라. 비바람이 그 열매의 껍질을 만들어 줄 것이다. 원치 않는 문이 열렸다면 VIP를 위한 자동문이 열린 것이니, 우아하게 세상과 삶을 기획하는 CEO의 걸음으로 그 문을 통과하라. 주저하면 위기이고 기꺼이 취하면 기회인 것이다. 쿨하게 한걸음 내딛기 위해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하다면, 서유미가 들려주는 엑소더스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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