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쌤의논술돕는책] 철학자야, 쇼 호스트야?
[신쌤의논술돕는책] 철학자야, 쇼 호스트야?
  • 북데일리
  • 승인 2008.03.21 10: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데일리] “다음 네 개의 제시문에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 있다. 이 네 가지 관계를 서술하고, 그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여 나머지 셋을 비판하시오.”

2007년도 서강대 수시 논술 문제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라…. 지금까지 출제된 대학 논술 시험에서 가장 어렵고 황당했던 논제였을 것이다. 실제 시험을 치른 수험생은 문제에서 도대체 무엇을 물어보는지 그것을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어떤 학생이 쓴 글을 보니 수필도 아닌 거의 창작 소설 수준이었다. 글이 비슷해서 채점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다양한 글들이 쏟아져 나와서 채점이 어려웠을 듯하다. 좋게 말하면 열린 논제, 창의성 논술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교 교육과정을 무시한 논제, 무책임한 논제로 볼 수 있다.

제시문 독해도 쉽지 않았는데 브레히트의 시, 미셸 푸코와 자크 라캉의 산문이 제시문으로 쓰였다. 가장 학생들을 괴롭히고 그래서 학생들이 논술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학교가 바로 서강대다.

그런데 논술 학원 입장에서는 서강대가 고맙다. 내가 아는 많은 논술 강사들이 학생들에게 “단기간에 논술 대비가 어렵다. 수능 끝나고 크레이지 논술 모드로 가서는 망한다.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를 체득시키기 위해 첫 수업 시간에 이 서강대 논술 문제를 써먹는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논술을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불안감을 덤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강사 입장에서는 고마운 게 또 있다. 서강대 문제로 학생들을 훈련시킨 뒤 난이도가 쉬운 다른 학교 문제를 차례로 풀게 함으로써 “내가 이 선생 수업을 듣고 나서 논술 실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착각을 갖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합격을 위해 학교 시험지까지 훔쳐내는 판에 이 정도 마케팅은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수준 아닐까?

제시문에 라캉이 나오고 주제가 주체인 논술 시험이 실제로 출제됐기 때문에 오늘은 (웅진지식하우스. 2007)이라는 책을 골랐다.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나온 이 시리즈의 타깃은 고등학생들은 아니다.

논술 시험 대비를 위해 학생들이 이 시리즈를 읽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출판사측에서 내심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최상위권 학생들이라도 이 책을 읽고 논술을 위해 교양을 쌓을 시간이나 여유는 없을 것이다. 라캉 읽기는 전공자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데 이 책의 저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전하는 라캉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그건 전적으로 지젝의 역량 덕분이다.

지젝은 들뢰즈와 함께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게 90년대 말인데 그때부터 철학이 대중들과 멀어져서 그렇지 좀 더 일찍 국내에 소개됐더라면 인기는 대단했을 것이다.

어려운 걸 쉽게 풀어가는 솜씨도 대단하지만 그는 자신을 포장하는 솜씨 역시 대단하다. 언변이 어찌나 좋은지 한국에서 그가 태어났더라면 연봉 10억 대의 스타 강사가 충분히 됐을 듯하다. 오죽하면 철학계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역자가 후기에서 그의 다변과 달변을 홈 쇼핑의 쇼 호스트에 비견했는데 정말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지젝하면 떠오르는 것은 영화다.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영화를 분석한다. 영화 잡지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고 히치콕, 매트릭스에 관련된 책을 썼다. 직접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해 히치콕, 채플린, 데이비드 린치 등의 영화를 환상과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다큐 영화도 찍었다.

아무리 라캉을 쉽게 썼다고 해도 책으로만 접하면 솔직히 필자 같은 비전공자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그가 주연한 영화를 보고 이 책을 읽었더니 훨씬 더 이해가 쉬웠다.

라캉 이론의 핵심을 요약하면 주체적 경험의 차원으로 도입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세 가지 질서다. 프로이트의 이드-자아-초자아와 비견될 수 있겠는데 상상계는 거울 단계로서 자아가 형성되는 이미지의 시기다.

상징계는 주체가 타자를 느끼는 대타자의 단계로서 언어와 법 등의 질서를 내면화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실재계는 언어나 이미지로서 파악하기 힘든 세계로서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서 자주 드러나는 환각 상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린치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프란시스 베이컨의 흉물스런 그림을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밖에 남근이나 거세 등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개념들과 욕동, 대상 α(알파), 주이상스(향락) 등 그가 새롭게 규정한 개념들이 이 책에는 섞여 있다.

지젝은 라캉의 이런 어려운 개념을 풀어서 설명하는 방식보다 라캉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시범을 보여주는 방법을 통해 라캉과 독자들이 친해지도록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젝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캉의 ‘이행’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남편(톰 크루즈)에게 일탈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섹스를 하자고 제안한 아내(니콜 키드먼)의 심리는 꿈속에서 대면한 실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현실로 깨어나려는 적극적인 이행의 사례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에일리언’에서 외계인 생물체의 아이디어가 라캉이 라멜라라고 부른 신화적 창조물에 기원하고 있다는 주장. 에일리언은 순수한 생명으로서 리비도고 파괴불가능하고 불멸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에일리언’ 이야기하다가 셰익스피어 희곡 ‘리처드 2세’를 언급하고 ‘주이상스’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 ‘카사블랑카’를 분석하다가 율리시즈를 겹치는 식으로 동서고금의 텍스트 속의 수많은 명장면들을 줄줄이 끌고 나와 신들린 듯 독자들을 홀린다.

영화라는 텍스트의 힘. 역사나 이론적인 맥락을 통해 라캉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택했다면 아무리 분량이 적은 책이고 개괄서라고 해도 필자 같은 비전공자는 독해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젝 덕분에 라캉이 누군지 이해가 되면서 나도 열심히만 하면 영화나 책 등의 텍스트를 이처럼 매혹적이고 마술적으로 분석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건 쉽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독자가 책을 읽고 관련 텍스트를 감상하고 싶은 마음을 유도하는 것과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거다. 논술 강사들이 학생들의 공포심과 불안감으로 마케팅을 하듯 지젝은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 유발과 자신감 부여를 일종의 마케팅 툴로 활용한 것이다.

많은 대학들이 정시에서 논술을 폐지하면서 논술 시장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지만 수시에서는 변별력이 여전히 있을 전망이다. 특히 논술가이드 라인이 폐지되면서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는 벗어나는 어려운 개념이나 제시문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형식면에서는 큰 변화는 없고 영어 제시문이나 수학 문제 풀이를 본고사로 받아들이는 국민 정서가 있는 한 대학들은 예년보다 논술 시험의 주제나 제시문을 어렵게 하는 수준에서 올 수시 논술의 변별력과 난이도를 대충 맞추려고 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고등학생에게 무슨 라캉이냐?”는 당연한 반론을 제기하고 싶겠지만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는가? 조변석개로 변하는 우리나라 입시와 공교육이 어찌 됐든 변별력만 따지는 일부 상위권 대학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