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이 가을 어디만큼 흘러가고 있는가
그대, 이 가을 어디만큼 흘러가고 있는가
  • 북데일리
  • 승인 2005.10.2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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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이 휘청거린다. 상사화꽃은 이제 지고 없다. 사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기억인 셈이다. 그 기억을 꺼내보는 추억의 풍경인 것이다.”

단풍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 찾아간 시인의 거처. 모악산방에 시인은 보이지 않고, 악양에서 보내온 가을편지가 구절초 마냥 쓸쓸하다. 섬진강 줄기 따라 지리산자락에 여장을 풀었을 박남준 시인의 길을 따라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2005)

사진이 눈에 보이는 기억이라면, 음악은 보이지 않는 상처의 회한인가. 산방을 적시는 첼로의 무거운 현이 불청객의 가슴마저 베고 있다.

“그 저녁 무렵이면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들로부터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귀 기울이면 오랜 나무들의...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꺾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이 완강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데이비드 달링의 <마이너 블루>가 저녁 무렵 같은 새벽의 빛깔이어서 우울하다.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가을바람이 차다.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흰 부추꽃으로’)

삶의 무거운 옹이들이 타서 흰 재가 되고, 재는 다시 흰 부추꽃으로 환생하니 마음이 아랫목처럼 따숩다. 밤새 비가 왔었나 보다.

“오는 밤비로 잠자리 뒤척였지/너도 밤새 비를 맞고 서 있었구나/싸리나무 그 꽃이 진 자리마다 맺혀있는/물방울 그 맑은/저 투명한 풍경으로 엮은 싸리비를 들고/어두운 내 삶의 뒤뜰이며 앞마당/훤히 쓸어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싸리나무 앞에서 잠긴다 가을 깊은 무렵이었다”(‘싸리나무 앞에서 잠긴다’)

싸리비로 어두운 삶의 뒤안을 쓸며 신새벽 오솔길을 걷는다. 쓰러진 나무의 길에서 시인은 가야할 길을 묻는다.

“저 쓰러진 나무와/다 버릴 수 없어 허리를 자른 나무들 사이에 나는 오래 망설인다 나무에 등 기대어 거기 스스로를 가두고 나무처럼 쓰러져 있다고 여긴, 나무가 쓰러지며 지워버린 한평생 저 허공중의 길과 내가 한때 쓰러졌다 여긴 이 길 위에서 나의 오늘을 물어본다”(‘미루나무가 쓰러진 길’)

마음속에 숱한 깃발을 세우고 무너뜨렸을 지난 세월이 진한 매화꽃 내음으로 흘러온다.

“깃발을 올려 손짓할 수 없는 날들/나도 한때 펄럭여보고 싶었다/마음의 당간지주 나 이미 버린 지 오래였으나/독하게 일별한 것들이 비쭉비쭉/이제 와서 고개를 내밀다니//때로 무너지고 싶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어/한번쯤 지독하게 무너지고 나서야/결국 은산 철벽 막다른 나를 알고 나서야/문득 실려오는 매화꽃 향내음/그래 강물만이 흐르는 건 아니지”(‘내 마음의 당간지주’)

세월의 강물에 녹은 푸른빛은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하여 솔씨를 품는 바우같은 사랑의 그늘 또한 넉넉하다.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 갈 수 있기 때문이야/흐르고 흘렀던가/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아름다운 관계’)

토방에 내려앉은 가을볕이 따뜻하다. 툇마루에 앉아 시인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단조풍의 첼로 곡을 듣는다.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놋숟가락 목이 부러진/......//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그 소리 듣자니 ‘이제 푸른 빛은 더 이상 우울이 아닌’ 듯하다. 갈 곳 없이 떠도는 것들도 언제인가 길 끝에 이르러 아득해진다고 하였던가. 시인과 데이비드 달링과 첼로음이 깊은 우물의 울림처럼 가을의 무릎을 잠기게 한다. 그대, 이 가을, 어디만큼 흘러가고 있는가.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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