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시인, 들녘 끝 지평선에 노래하다
길 잃은 시인, 들녘 끝 지평선에 노래하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10.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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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싶었다”

초록의 벼들이 사운거리는 ‘징게 맹게 너른들’의 풍경을 조정래 선생은 대하소설 ‘아리랑’ 첫 문장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땅과 하늘이 닿아 지평선을 이루고, 지평선이 흘러 서해의 수평선에 이르니 거기에 담긴 이야기들 참 많겠다. 시인 정 양의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 2005)를 읽으면서 지평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전라도 모악산 아래/금산사 아래 제비봉 아래/솔개봉 아래 금평저수지//......//여기가 바로 정여립이/대동계를 모으던 집터란다/......//왕후장상이 양반이 쌍놈이 따로 있느냐/어울려 대동세상 만들자던 꿈이/이렇게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두런거리며 모여들었구나” (‘대동계 집터’)

호남평야의 젖줄인 모악산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꿈들이 모여, 개울이 되고 하천이 되어 마침내는 기나긴 강이 되었으리라. 그 강줄기를 따라 들려오는 풍문 많기도 하다.

“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 각씨들 다 데리고/삼팔서늘 너머가때야/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인공 때 남도 어디서 군땅위원장을 혀때야/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지리산으서 대장 노릇을 허더래야” (‘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

동네 냇가에 모여 수군대는 아낙들의 똥그란 귀가 놀래 벌어져 있다. 잘못 뱉어내면 죄로 갈까봐 침을 꼴깍 삼키면서, 간간히 휘두르는 빨래방망이 소리 쩌렁쩌렁 울리겠다.

“고지 한 몫이 쌀 한 말,/겨울에 고지 한 몫 먹으면/이듬해 농사철에 닷새 일을 해야 한다/고지먹은 일 제때에 못한 일꾼은 이듬해부터/고지도 못 얻어먹는 게 불문율이다//......//말수 적고 살비듬 고운 과부댁,/이서댁네와 잠자리를 한 번 하면/그게 바로 고지 한 몫 먹는 것이다”(‘고지먹기’)

아낙들만 비밀이 있을까. 고기도 아니고 거시기도 아닌, 고지를 먹은 남정네들이 떠는 으뭉이 껄쩍지근하다. 고것의 맛이 벌교의 꼬막처럼 꼬소하지는 않는 갑다. 그들 앞에 놓인 삶이 간단치 않기 때문인가.

“굶어 죽는 꼴을 꼭 보아야/익겠다는 듯이/자고 나도 자고 나도 퍼렇기만 한/야속한 보리밭을 건너다보면서,//애기 잡아먹은 문둥이가 보리 깜부기로/눈썹 그리며 시치미 떼던 보리밭 둔덩에/문둥이 몰래 저물도록/허천나는 삐비나 뽑아 먹었다” (‘보릿고개’)

문둥이 무서워 보리밭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길섶에 흐드러진 삐비나 허천나게 먹던 세월의 고개가 허기지다. 땅도 가진 자의 몫이어서, 땅에서 저주받은 자들의 생은 작대기 하나 제대로 패대기치지 못한다.

“휘둘러버릴 살림살이도/등짐도 다 벗어던진 채 주저앉아/이 작대기로 땅바닥 치며/펑펑 울던 사람아//이 세상에는 무식하게 후려칠 것들이/아직도 얼마든지 남아 있는가/부러져라 내리쳐도 안 부러지던/반질반질 손때 묻은 작대기 하나/아직도 문기둥에 기대고 있다” (‘작대기’)

그 손때 묻은 작대기 임자와 평생을 살았을 할머니가 세월의 약을 달여 시인에게 내놓는다.

“이렇게 아무 풀이나 뜯다가/독초라도 섞이면 어떡하냐고 했더니/못난 사람 못된 사람 다 소용 닿듯이/맛만 보아도 대번에 숨이 넘어가는/소문난 독초들이 섞여야 더 약이 된다며/나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할머니는/두어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백초즙’)

시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지평선과 맞닿은 포구에서 지평선을 찾는다. 풍경 속에서 풍경을 찾듯, 길 위에서 길을 찾는다.

“아줌마, 얼마나 더 가야 지평선이 나와요/여그가 바로 지평선이어라우/여그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어라우/바람 들옹게 되창문이나 좀 닫으쇼잉//그렇구나 이 세상에는 천지사방/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눈 감아도 떠도 다 가물거리겠구나” (‘지평선’)

참말로 문이나 닫으랑게 뭐한대요. 저 냥반 보따리 빠졌능갑네. 황소바람 들어와쌓는고만.

“잃어버린 길 위에 까마귀떼/까마귀떼도 길을 잃었나보다/어디로 날아가지도 않고/눈밭에 우두커니들 서 있거나/느릿느릿 서성거린다//......//들끓는 검은 피에 취하여/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개를 끄덕이며/눈길을 여는 까마귀를 따라간다/또 눈이 오려는지/먼 마을 연기가 낮게 깔린다”(‘눈길’)

끝 간 데 없이 너른 들판에 내린 눈. 하얀 눈 위에 점처럼 서 있는 까마귀떼. 까마귀가 움직이자 비로소 길이 열린다.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그 곳에 오롯한 길 하나 열려있다. 지평에 서서 길을 바라보는 시인의 품이 징게맹게 너른 들과 같아 보인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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