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발해` 김홍신 “시작은 동북공정에 대한 분노"
`대발해` 김홍신 “시작은 동북공정에 대한 분노"
  • 북데일리
  • 승인 2007.08.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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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대발해> 펴낸 소설가 김홍신

[북데일리]‘손’ 으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원고지는 천형이다. 팔은 물론 온몸에 마비가 오는 것이 다반사. 작업 기간이 길어지면 증세는 더 심해진다. 움직이지 못하는 근육은 생명을 잃고, 빛을 못 쬔 피부는 알레르기에 시달린다. 그것은 컴퓨터가 아닌 ‘펜’을, 밖이 아닌 ‘안’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의 가혹한 운명이다.

이런 고통의 글쓰기를 2년 7개월이나 버티며 원고지 1만 2천장을 써낸 괴력의 작가가 있다. 역사소설 <대발해>(전 10권)(아리샘. 2007)를 발표한 소설가 김홍신(60)이다. 그는 이 방대한 작업을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완성했다. 매일 12시간씩 책상에 매달려 20매씩 규칙적으로 썼다.

그 덕분에 온갖 병을 얻었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진통제 주사까지 맞아 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피부병도 얻었다. 너무 오래, 빛을 쐬지 못한 결과다. 오랜, 그리고 지독한 글쓰기는 김홍신의 머리숱을 줄게 했고 불면증을 불러 왔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바로 ‘잃어버린 역사’ 발해를 복원시키기 위해서였다. 28일 대치4문화센터(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서 만난 김홍신은 여전히 수척해 보였다. 그러나 강단에 오르자 그는 곧 돌변했다.

강남구와 (사)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주최한 이날 강연에서 그는 동북공정에 대한 분노를 금치 못했다. 강연 후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샘솟는 그의 기운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왜 발해를 쓰셨습니까”

- 만약, 내가 아버지를 버렸다면 후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발해는 우리 역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장엄한 역사를 버렸습니다. 그게 외세에 의한 것이었든 선조들이 버렸든. 되살려야 되지 않겠어요. 1천년의 민족사를 후손 누군가는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내 아버지이자 우리의 아버지를 되찾는 일과도 같았습니다.

“발해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 시피 합니다. 취재과정이 궁금합니다”

- 발해 멸망에 대한 근거가 하나도 없어요. 중국, 러시아 등지를 취재하면서 역사 자료가 될 만한 문명사적인 것 대부분이 불태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구속을 각오하고 잠입 취재를 한 일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발해와 일본이 교역한 뱃길을 직접 건너 봤고, 극동 대학 박물관에서 발해 유물 20여점을 가지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고증 이었습니다. 치열한 취재를 거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분노의 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 근본은 동북공정입니다. 북한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태도를 보면 분노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은 지금 세계를 재패하겠다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번성을 되살리자는 운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장 큰 희생타가 바로 한국입니다. 조선족, 고구려 발해 역사, 북한, 위그르, 티벳 문제가 얽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피해가 큽니다.

“소설가는 역사를 쓰면서 어떤 책임감을 느낍니까”

- 여러 경우가 있을 텐데. 이번 같은 경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철저한 역사 고증이었습니다. <대발해>는 발해 역사 전체를 복원한 통사에요. 최초로 이루어진 작업이죠. 발해 역사의 99%는 중국 기록입니다. 나머지 1%가 거란, 일본, 고려, 삼국사기, 삼국유사, 후대 연구 기록입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실증적으로 그려낼 것인가가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소설이지만 독자들이 ‘역사’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어떤 기록도 없기 때문에. 사실을 복원시키는 게 중요했습니다.

“퇴고 후 2천 5백매를 들어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잘려 나갔나요”

- 3년간 집중하다 보니, 간결하게 문장을 정리 할 수 있는 것을 그렇지 못한 게 있어서 퇴고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사건도 여럿 덜어 냈고요. 그러지 않으면 책이 너무 두꺼워 지거나 13권 분량이 될 것 같았죠. 3천5백매를 없애고 다시 1천매를 써넣었습니다. 가지치기 하듯 쳐 낼 때는 새끼손가락을 잘라 내는 것 같았어요.

“4백 명의 이름을 짓고 발해 연표를 만드셨습니다. 이 지난한 과정을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남기는 게 국회의원 열 번 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법륜 스님의 말씀이 시작이었습니다. 쓰면서는 우리 민족이 이렇게 위대하고 훌륭한 DNA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수도 없이 그만두고도 싶었고 심지어 죽고도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조상들이 나를 끌고 갔던 것 같아요

글 쓰는 내내 주변에서 “저사람 죽는다. 못쓰게 하자 그랬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밤 2시 3시에 전화해도 받아주는 고마운 사람들 덕에 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인터넷을 못해요. 그러니 새벽이건 밤이건 쓰다 막히면 자료를 찾기 힘듭니다. 그럴 땐 이거 찾아 달라, 저거 찾아 달라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아들 딸 모두 나때문에 잠도 못자고....

“정치인에서 소설가로 돌아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정치를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 얻은 것은 정말 많죠. 내 평생에 8년간 1등해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공부에서 1등해 본 적도 한 번도 없는 데... 지금도 좋은 제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할 일이죠. 또 정치 경험은 소설 쓰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예산결산, 대변인, 홍보위원장을 하면서 끊임없이 정당하고 싸웠기 때문에 국가 전체를 들여다보는 안목이 필요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라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게 됐고요. 이런 경험들이 글 쓰는데 상당한 도움이 됐습니다.

다만 잃은 게 있다면, 독자가 아닐까 해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릿합니다. <인간시장> 때도 내가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독자들이 성원해주었기 때문이에요. 독자들이 나를 지켜 준 거죠. 정치해줘서 고맙다고 한 분도 계시지만, 왜 했느냐고 야단한 분도 계셨어요. 그 모든 분들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책을 썼습니다.

“오랜만에 소설을 쓰셨지만 자신감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 뭐랄까. 점점 철이 드는 것 같아요. 지금은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소설이라 독자들이 재미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재미있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잃어버린 천년의 역사를 복원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을 땐 내 고통이 부끄럽지 않구나 라는 생각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쪽으로만 말 한 겁니다. 아쉬운 부분도 있죠. <대발해>는 죽을 때까지 고칠 겁니다. 계속.

“어떤 작품을 쓰실 계획 인가요”

- 정치는 미워해도 국민과 나라는 사랑해달라는, 그런 마음을 담은 정치 소설을 쓰고 싶어요. 또 붓다의 이야기도 쓸 계획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싶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찬란하고 그래서 지독하게 아픈 사랑이야기도 쓰고 싶어요. 지금 메모를 엄청나게 하고 있습니다. 예쁘고, 찬란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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