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헹구는 당신의 가을노래 `시인의 모자`
영혼 헹구는 당신의 가을노래 `시인의 모자`
  • 북데일리
  • 승인 2005.09.2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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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조 선생께,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설악산 대청봉에 단풍이 들었다는 성급한 소식들로 술렁입니다. 초록이 번지고 단풍이 물드는 것을 앞지르는 속도의 세상에서 시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합니다. 연일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읽히는 시집보다 시인이 많은 나라에서 더욱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때가 타는 세상을 깨끗이 소모하는 이 시대의 희한한 성자가 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이 마땅찮아 `뼈만 남은 멸치`로 계신 겁니까. 그도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한탄강 억새로 서서, 게으른 늙은 사공 카론과 나루터에서 회한의 잔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갓 받아본 새 시집들을 보면서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멋쩍어 허물 벗고 잠적하는 것일까’ 노심초사 하셨지요. 양파 껍질은 눈물깨나 흘리며 벗겨야 말간 속살이 드러나듯, 사람도 마음 안팎 허물부터 벗겨야 한다고 성선설을 역설하던 당신은, 거저 받는 서설도 짐이 된다며 지금도 푸른 죽비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때론 시멘트 길 위에 온몸으로 쓴 지렁이의 일대기를 잘못 읽어대는 촉새의 방정을 나무라기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두개골을 쪼개 불씨처럼 잘 여문 시의 향기를 지상에 쏟아놓는 석류부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생은 가끔 외로울 때 빛난다고 하셨지요. 길을 다 가면 빈 낚시처럼 물음표로 휘어진 게 생인 지 되묻기도 하셨고요. 한 때는 앙상한 통뼈로 모진 세월을 견디는 말뚝의 옹고집도 보였습니다. 그러다 몰래 심은 홀씨 찾으러 간 강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문득 ‘너무 멀리 와 있다’고 탄식도 하셨지요.

그보다 `고목도 봄이 되면 세상에 신작을 발표하듯 새잎을 낸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지천명의 연세에 말입니다. 또 생의 뒤란을 갈아엎어도 억새처럼 자라나는 욕망들을 불씨 삼아, `언어의 빛으로 만든 방화`를 꿈꾸었지요. 그 꿈의 뿌리는 어린 졸참나무를 부축하는 늙은 소나무가 보여준 상생이었습니다.

당신은 길이 끝나는 곳에 언어가 있고, 언어가 끝나는 곳이 사막이라고 말합니다. 그 언어를 읽는 독자는 바람이고요. 그 길 없는 길을 가는 낙타는 등에 진 육봉이 제 무덤이 될 때까지, 가도 가도 끝 모를 길을 걸어갑니다.

그 길이 당신이 말하고 싶은 시인의 길입니까. 등에 제 무덤을 짐처럼 지고 다니는 사람. 달변의 항문으로 끈적끈적 갈겨 쓴 글줄과 단호한 경계를 긋고, 고된 여생을 풀어 허공에 필생의 무늬를 새기는 사람. 허튼 소리로 집적거리거나 했던 말 또 내뱉는 누에와 같은 사람에게 따끔한 쐐기를 박아주는 사람.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잘 마른 소나무 장작불로 생의 옹이마저 온전히 태워 완성되는 존재의 가벼움.

“나의 새해 소망은/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시인’이란 대저,/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돈 주고도 못 사고 공짜도 없는/그 무슨 백을 써서 구할 수 없는/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시인’이란 작위를 받아보고 싶다/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시인의 모자 하나 써보고 싶다/나의 새해 소망은”

평생을 진짜 좋은 시 한 편 얻기 위해 노심초사한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별이 되어 밤하늘에 총총합니다. 영혼을 헹구는 당신의 노래 ‘시인의 모자’(2003. 창비)를 읽은 독자들의 가슴 벅찬 올실 짜는 소리 들려옵니다. 가을 가고 겨울이 와도, 하늘에 떠 있는 당신의 모자로 어쩌면 내내 따뜻한 시절이 될 듯 합니다. 춥지 않으시지요.

p.s. 시인 임영조는 2003년 5월 28일,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림 = 파플로 피카소 作 `시인`, 1910)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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