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아버지를 묻던 겨울
김훈, 아버지를 묻던 겨울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5.10.08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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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가 출간 됐다. 이번 <라면을 끓이며>(문학동네.2015)에는 가족 이야기부터 기자 시절과 섬에 들어가 쓴 글들까지 김훈의 어제와 오늘이 담겨있다. 그 가운데 시선을 잡아 붙든 그의 가족 이야기가 있다. 추운 겨울 아버지를 보내는 먹먹한 장면이다.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언 땅이 곡괭이를 튕겨내서, 모닥불을 질러 땅을 녹이고 파내려갔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육군에서 갓 제대해 밥벌이를 찾아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은 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중략)

땅을 파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 갈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다급하고도 악착스런 울음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들을 꾸짖어 단속했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한테서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나는 가부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부장이었던 것이다. ‘오빠’라는 호칭은 지금도 나에게 두렵고 버겁다. 나는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내 여동생들은 나를 ‘작은오빠’라고 부른다. 이, ‘작은오빠’라는 호칭은 여전히 나를 목메게 한다. - 32~33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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