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아무도 `취하지 않는 밤`은 없다
시인에게 아무도 `취하지 않는 밤`은 없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09.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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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끊고 한 열 달 지나 꿈속에서 술 마시고/아이고 십년계획 도로아미타불이라고 엉엉 울다 깼다/깨어 꿈인 걸 알고 기뻐서 방바닥을 쳤다."(‘꿈에 크게 취함`중에서)

시인이 꿈에 술을 마셨다고 저리 통곡하다니 좀 아리송합니다. 대저 시인과 술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그 실마리를 이백과 두보에서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합니다.

백은 술을 즐기면서 마셨지만 두보는 술에 웬수 진 사람처럼 마셨다고 합니다. 이 두(李-杜) 시인이 낙양의 어느 주점에서 만나 술 백 동이와 시 백편을 나눴다고 하니, 대체 누가 뻗지 않고 살아남았을까요. 참고로 두보는 말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도 병문안 온 친구와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나는 시인에게 깨어있기 보다 취해있기를 권하고 싶다. 취기와 광기를 저버리는 것은 시인에게는 죽음이다”라고 고은 시인은 말했답니다. 또 “시인들 가운데 술꾼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며 “이는 최근의 시가 가슴에서 터져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일갈 했답니다.

이면우 시인의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는 `시인과 술`과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술과 친하지 않은 시인은 정말 머리에서 시를 짜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취하지 않은 시인이 짜낸 올실이, 그를 읽는 이를 거미줄에 맺힌 이슬처럼 젖게 한다면 어떤 감흥일까’ 생각해봅니다.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망에서 떼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거미’중에서)

불혹과 지천명 사이. 취한 것도 아니고, 안 취한 것도 아닌 시인의 마음이 궁금합니다.

"나이 쉰 되며 비로소 피가 맑아졌다 속으로 휴우, 한숨 쉬며 안도한다 이젠 여자를 무심히 볼 수 있게 된 거다"(‘부전자전`중에서)

술도 안마시고 여자에게도 무심하다면 대체 이를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까요. 그냥 이쯤해서 이눔의 시읽기를 끝내고 싶어지네요. 허 험!

"열일곱, 처음 손공구를 틀어 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손공구`중에서)

그랬군요. 스물 서른 마흔을 지나 지천명을 바라보며 비로소 해결 안 된 사람의 일상으로 걸어가는 시인의 무심. 삼십년을 쥐고 산 공구에서 스며드는 따스한 손바닥, 아니 그 무쇠 속에 배어있는 눈물이 읽혀집니다.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쳐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중에서)

한 해 1,000병 이상의 소주를 마셨다는 어느 시인에게 술이란 시를 짜내는 묘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약직 보일러공인 시인에게 삶은 `십오층 옥상 난간에서 도시의 불빛을 지켜보다 주먹 불끈 쥐고 내려간` 어떤 이의 마음과 같은 것이기에,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듯` 십년이 넘도록 술을 끊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인의 눈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는 나무와 같다.

“나무 되고 싶은 날은/저녁 숲처럼 술렁이는 노천시장 간다/거기 나무 되어 서성대는 이들 많다/팔 길게 뻗어 좌판 할머니 귤탑 쓰러뜨리고/젊은 아저씨 얼음 풀린 동태도 꿰어 올리는/노천시장에선 구겨진 천원권도 한몫이다 그리고/사람이 내민 손 다른 사람이 잡아주는 곳/깎아라, 말아라, 에이 덤이다/생을 서로 팽팽히 당겨주는 일은, 저녁 숲/바람에 언뜻 포개지는 나무 그림자 닮았다/새들이 입에서 튀어나와 지저귀고 포르르릉 날다가/장바구니에, 검정 비닐봉지에 깃들면/가지 끝에 매달고 총총 돌아오는 길/사람의 그림자, 나무처럼 길다”(‘노천시장’)

그나저나 소주 위스키 등 알콜도수가 높은 증류주의 국민 1인당 소비량이 우리나라가 세계 4위랍니다. 명절이 되면 즐겁다고 한잔, 슬프다고 한잔 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합니다. 술 마시고 쏟아내는 이야기도 진솔해 보이지만, 술 마시지 않고 전하는 이야기는 행여 어떨까요.

술 마시지 않는 시인. 공무원이나 성직자를 떠오르게 하는 시인의 가지 끝에 걸린 비닐봉지를 보면 유쾌한 취기가 나무처럼 길게 드리워집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취하지 않는 밤은 없는 것은 아닐 런지......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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