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가까이에' 한윤형, 일베, 신경숙적인 것을 넘어
'악마는 가까이에' 한윤형, 일베, 신경숙적인 것을 넘어
  • 김상범
  • 승인 2015.06.22 22:2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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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경숙 작가의 표절논란과 이른바 한윤형이라는 ‘젊은’(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논객의 ‘데이트 폭력’ 혐의로 SNS뿐만 아니라 온라인 전체가 뜨겁다. 어떤 사람은 이 둘을 엮어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선정주의’의 혐의를 씌울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 인물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사실 한윤형은 ‘신경숙적인 것’이 열어놓은 담론의 장이 없었다면 유명한 ‘논객’으로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글쟁이인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가 설령 ‘천재’라고 할지라도 ‘담론의 환경’이라는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이러한 담론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했다면, 그저 ‘비운의 천재’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윤형을 성공하도록 만든 ‘담론의 환경’을 구성한 ‘신경숙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획일화된 도덕과 거대 서사와 이분법의 폭력’에 맞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상성과 다양성의 윤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한윤형의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 잘 보여준 것과 같이 ‘상식인의 사실주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글의 논리성과 문체의 탁월함을 예찬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논리’나 ‘문체’ 때문에 열광적인 감동에 빠지는 것은 거의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예술적인 것이나 지적인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악한다고 해도 그다지 열광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람의 거의 모두가 진중권 글의 ‘논리성’이나 ‘문체의 탁월함’을 인정하지만, 진보진영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글이 열광적인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에서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윤형이 그토록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글에서 나타난 탁월한 ‘윤리적 감각’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세련된 ‘윤리적 감각’은 ‘계급투쟁’의 이분법적이고 투박하고 집단주의적인 거대담론에 의존하는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그것은 ‘신경숙적이고’ ‘포스트모던한’ 담론의 환경과 ‘일상성’과 ‘다양성’에 대한 담론소비자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윤형의 문체와 논리성이 뛰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의 세련된 ‘윤리적 감각’에 우선적으로 감동했고, 자신들의 감동을 나름대로 뛰어난 논리와 문체를 통해서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글에 더욱 열광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논리’와 ‘문체’를 예찬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자신들의 감동에 이성적이거나 예술적인 이유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신경숙과 한윤형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던 ‘신경숙적인 것’은 이제 그 한계가 노출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한계’의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이분법적인 도덕에 대한 비판이 또 하나의 이분법에 빠져 버린 것에 있지 않을까? 486적이고 집단주의적이며 아저씨적인 것과 분리되어 있다는 윤리적 우월감이 그들을 자기 최면에 빠지게 한 것은 아닐까? ‘악마’는 저 멀리에 있으며, 단지 신랄한 비판의 객체로 ‘대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일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일베’, 혹은 우리 이웃에 있는 ‘일베적인 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옳다. ‘우리 안의 일베’, ‘우리 이웃에 있는 일베’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일베보다 더 일베적으로’ 될 수 있다. 데이트 성 폭력은 사실 많은 일베 유저들도 쉽게 행하지 못하는 일이다. 악마는 가까이에, 아니 내 안에 언제나 대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악마를 끊임없이 진지하게 인식하고 대결하는 것만이 진정한 ‘윤리성’을 획득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윤리성’은 코드화된 도덕체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코드화된 도덕의 악마성까지도 고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숙적인 것’은 오늘날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계승해야 할 부분이 있다. 신경숙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은 신경숙적인 것을 대상화하고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끌어안고 그것보다 더 나은 윤리성을 구축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블로거 김상범>씨는 서평가, 일명 서평꾼입니다. 과학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현재 포항공과대학교를 휴학중입니다. 다수 웹진에 인문학 논문이나 서평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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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 2015-08-01 10:53:02
무슨 개소리지?. 결국엔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는거 아녀. 더욱 치열한 자기검열과 자기비판을 감행해야 한다는 건데. 그냥 쉽게 이야기하자. 신경숙적인 것이라는 표현은 너 말대로 선정적이네.

ksb 2015-08-03 16:16:11
모든 글을 '실천적인 강령'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이 글에는 복잡한 논의가 있고,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결론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신경숙적인 것'과 한윤형의 성공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인게 왜 선정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