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은 저항할 수 없는 '혀의 키스'
속삭임은 저항할 수 없는 '혀의 키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21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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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새하얀 마음』중에서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책을 읽다보면 문장에 빠져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황 전개나 인물의 내적 갈등이 아니라 바로 그 '문장' 자체에 말이다.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게 된다. 이해를 위한 읽기가 아니라 매혹적이라 자꾸만 읽는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새하얀 마음』(문학과지성사. 2015) 에서도 이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말은 폭풍우가 지나간 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 빗방울은 언제나 같은 곳에 떨어져 땅을 연약하게 만들고 끝내 땅속으로 파고들어 구멍이 뚫리고 물길까지 생긴다. 타일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배수구로 사라지는 수돗물 방울과는 다르며, 얼마 가지 않아 흐름이 끊기는 핏방울과도 다르다.

 핏방울은 손이나 수건이나 붕대나 때로는 물로 그 흐름이 끊긴다. 아직 의식이 있고 자해한 것이 아니라면, 피를 흘리는 사람 자신의 손만으로도 가능하다. 피나는 것을 막으려면 구멍 난 배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면 된다.

 귀에다 혀로 속삭이는 것은 키스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을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키스다. 때로는 저항하는 상대를 누그러뜨리는 것은 눈도 손가락도 입술도 아니라 면밀히 탐색하여 무장해제시키는 혀다. 속삭이며 키스하는, 강요하는 혀다.

 듣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곧 안다는 것이며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에는 들려오는 소리를 본능적으로 차단하는 눈꺼풀 같은 것이 없으며, 이제 듣게 될 말을 미리 예측하여 조심할 수도 없다. 언제나 너무 늦어버리는 것이다.’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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