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병 확산이라는 기발한 발상
천재병 확산이라는 기발한 발상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17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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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의 <국경시장>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존재가 불확실한 것들은 공포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귀신이나 유령 같은 것. 그것들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 후 공포의 대상은 잘 알려진 범죄자나 질병으로 바뀐다. 공포를 이기는 방법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김성중은 <국경시장>(문학동네.2015)에서 현실과 맞닿은 모호한 경계로 유도해 공포를 잊게 만든다.

 ‘한동안 숨을 고르고 몸을 일으켜보니 거기에는 내가 두려워한 풍경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사면상도, 열두 골목을 가득 메운 이국적인 상품도, 물고기를 잡던 소년들과 수상한 환전상도, 멋진 창녀들과 처음으로 산 종이가면도, 로나와 주코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부서진 노란 물고기 비늘만이 지나간 밤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먼지바람이 불어오는 강둑에 서서 풀숲 사이의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국경시장」, 34쪽)

 표제작 「국경시장」은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국경이라는 공간이 제시하는 묘한 신비감은 고단한 삶으로 단단해진 긴장을 풀어놓게 만든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보았다면 맞는 말일까?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환상이라고 설명하고 싶지 않다. 버리고 싶은 기억을 팔아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국경시장. 문신처럼 새겨져 절대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의 한 조각이 화폐로 교환되는 놀라운 곳에 발을 들이민다. 기억 전부를 팔아 다른 나로 살고 싶은 열망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버려진 기억 조각들이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다른 나를 원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를 갈망하기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부여된 천재적 재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쿠문」의 주인공과 그를 동경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천재병 확산이라는 설정은 얼마나 기발한가. ‘쿠문’에 전염되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원하고 원한다. 「쿠문」의 기발한 상상은「관념 잼」으로 연결된다. 유혹과 욕망에서 벗어나 관조의 삶을 선택한 주인공 낙경씨는 사물의 반란과 마주한다. 옷장에서 프라이팬이 나오고 거울은 검고 딱딱하게 변한다. 사물이 자유롭게 변하듯 인간 낙경씨도 유리병이 되고야 만다. 사물이 되어 인간의 세상을 바라본다.

 김성중의 사고로 보자면 인간(사물과 생물 역시)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 서슴없이 악을 행한다. 「필멸」의 주인공 앙투안은 작곡가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고 싶지만 후원도 재능도 없다. 그가 다니는 음악원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영국 귀족 제프리, 든든한 집안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의 뱅상, 신심 깊은 노력파 비투수가 있다. 진실한 친구는 아니지만 경쟁자인 네 사람은 뱅상이 경마로 번 돈으로 화려한 밤을 보내고 놀라운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결코 나눌 수 없는 선율이었다. 주인이 되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다.

 ‘진실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물리력뿐이었다. 범속한 인간 사이의 경쟁이 대개 그렇듯.’ (「필멸」, 164쪽)

 그리하여 달라진 삶을 위해 기억을 팔고 병에 전염되기를 원한다. 상상의 크기만 다를 뿐 소설 속 인물은 모두 우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김성중은 인간 스스로 만든 틀을 변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더욱 완벽해지는 꿈처럼 말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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