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장] 몸뚱이 밑바닥에서 나사가 풀렸다
[명문장] 몸뚱이 밑바닥에서 나사가 풀렸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17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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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 중에서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감정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슬프다, 속상하다, 가슴이 저리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극한의 공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억만장자의 유산을 노리는 비서의 제안을 수락한 여주인공의 이야기 <지푸라기 여자>(북하우스. 2015)에선 차분하게 설명한다. 담담한 묘사가 절망과 두려움을 몇 배로 증가시킨다. 임수정, 유연석 주연한 <은밀한 유혹>의 영화에선 임수정이 어떻게 그려냈을지 기대가 크다.

‘그녀의 몸뚱이 밑바닥에서 조그만 나사 하나가 풀렸다. 그러자 몸뚱이가 멋대로 해체되지 시작했다. 힐데가르트는 이제 무섭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았다. 욕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귓전에서 그들의 대화가 웅웅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그들을 보았지만 그 사이에는 높다란 탑이 있었고, 그녀는 그 탑 안에 홀로 갇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면서 다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들은 탑 밖에 있었다. 그들도, 그리고 그녀와 한 번도 말을 나눈 적 없는, 이 나라에 사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나라에 사는 것도 아닌, 그녀가 절대로 갈 일이 없는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도, 전부 탑 밖에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빈손으로 혼자, 관 속에 드러누운 익명의 시체처럼, 감각도 없이 평온하게, 그러나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닌 채 탑 안에 있었다. 죽은 것과 완전히 죽지 않은 것,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은 그녀에게 이미 아무 의미도 없었다.’ (271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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