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농사` 깨우친 시인의 귀거래사
가을 `하늘농사` 깨우친 시인의 귀거래사
  • 북데일리
  • 승인 2005.09.0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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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는 새우와 전어가 팔딱거리고, 땅에서는 가지와 고추가 묵직하게 익어간다. 산에서는 성질 급한 집게벌레가 참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어린 도토리를 바닥에 던지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가을이다.

산길을 걷다가 문득 발밑에 떨어지는 도토리에 놀라 본 사람은 알아야 하리라. 꽃이 떨어지듯 팽그르 떨어지면 집게벌레의 짓이고, 짱돌처럼 머리에 와서 콩 박으면 청설모의 장난이고, 주머니에 불쑥 들어오면 싸이코월드의 소행임을 말이다.

이처럼 먹는 것 가지고 장난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윤재철 시인이 `세상에 새로 온 꽃`(2004. 창비)을 들고 세상에서 가장 생존력이 강한 ‘시골 아줌마’들과 동네 뒷산을 오른다. 따라가 보자.

"아침마다 아주머니들/배낭하나 등에 메고/보자기를 자루처럼 배 앞에 두르고/도토리 주우며 산을 오른다/어제 샅샅이 주운 자리에/또 어제만큼 떨어져 있는 도토리/허리 숙인 만큼/팔 뻗었다 올린 만큼 도토리를 줍는다/그 일이 짜증나서 어떤 남정네/해머 들고 도토리나무 두들기지만/오늘 많이 주우면/내일은 주울 것이 없다/그리고 모레 떨어질 것은/아무리 해머로 두들겨도/끝내 떨어지지 않아/모레가 되어야 하늘에서인 듯 떨어진다/그래서 아주머니들/도토리 농사는 하늘 농사라서/하늘이 들판을 굽어보시고/들농사가 흉년이면 도토리를 풍년 들게 하시고/들농사가 풍년이면 도토리를 흉년 들게 하신다고/옛날부터 그렇게 믿으며/아침마다 산에 오른다" (‘도토리 농사1’)

뒷산 잣나무 숲에 오르면 간혹 온 가족이 몰려나와 자체 제작한 각목으로 ‘신기전’을 만들어 쏘기도 하고, 자칫 살상의 위험이 있는 ‘비격진천뢰’같은 돌팍을 사정없이 던져댄다. 이런 분들에게 잣을 힘 안들이고 얻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먼저 다람쥐가 들락날락하는 지점에 숨어있어라. 그럼 꼭대기에서 잣이 툭 하고 떨어진다. 다람쥐가 수직강하하여 제 힘으로 버거운 잣을 옮기려고 힘들어 할 때 점잖게 접근하여 한마디만 하면 된다. “힘들어 보이는데 좀 도와드릴까요.” 그럼 다람쥐는 잣을 맡기고 다른 나무로 옮긴다. 반드시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곡한 청유형이어야 한다.

그러나 다람쥐도 살아야 한다. 추운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월동식량이 필요하다. 그 식량을 뺏다가 수틀리면 잣나무를 ‘에라’하고 차고 가는 것은 다람쥐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일이다. 다람쥐의 겨울나기를 보면서 시인은 인류의 생존방식을 안데스산맥 고산지대로 숨어든 잉카의 후예들에서 찾는다.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쫓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은 잘디잔 형형색색의 십 여종의 감자. 이놈 저놈 뒤섞여놓으니 가뭄과 추위와 벌레에도 농사를 망치는 법은 없다. 그러니 “우리가 다시 가야할 집은 거기 인디오의 잘디잔 형형색색의 씨감자 아닐까”라고 시인은 묻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신가”라고 되묻는다.

"오이가 비를 맞고 있다/가락시장에도 못 간/구부러지고 볼품없는 흰 오이/예닐곱 개씩 쌓아놓은/무더기가 예닐곱 개/좌판도 없이 /아스팔트 맨땅 위에/얇은 비닐 한장 깔고 앉아/비를 맞고 있다/장날도 아닌 공주 시장/비는 주룩주룩 내리고/아주머니는 중국집 처마 밑에/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있는데/대책없는 오이는 시퍼렇게 살아/다시 밭으로 가자고 한다" (‘공주 시장’)

"뇌졸중으로 쓰러져/의식이 점차 흔미해지면서/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거기서 아버지는 몸부림치며/집으로 가자고 소리쳤다/링거 주삿바늘이 뽑히고/오줌주머니가 떨어졌다/남자 보조원이 아버지의 사지를/침대 네 귀퉁이에 묶어버렸다/나중에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짐승처럼 몸부림만 쳤다/팔목이며 발목이 벗겨지도록/집으로 가자고/고향도 아니었다/집이나마나 창신동 골목길 셋방이었다" (‘아버지’)

중국집 처마 밑에서 야위어가는 어머니와 병원침대 귀퉁이에 사지가 묶인 아버지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희한한 일이지/이게?왜 아까는 안 보였을까/그렇게 샅샅이 훑고 뒤졌는데/왜 안 보였을까/산보 삼아 도토리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며/도토리 주워보지만/낙엽 속에 숨은 도토리는/이쪽에서 보면 보이지만/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또한 아주머니들 아침이면/죽 훑어 산을 오르지만/보는 만큼 줍고/보이는 만큼 줍는 일이지/안달하며 죄 주우려고 머무는 법은 없다/오늘 안 보인 것은 내일 보이고/내가 못 본 것은 남이 보고/그래도 안 보이는 것은 낙엽에 묻혀/다람쥐도 먹고 벌레도 먹는다/ (‘도토리 농사2’)

다람쥐와 집게벌레와 사람이 공존하는 ‘하늘농사’를 깨우친 시인의 귀거래사가 사뭇 넉넉하다. 잣나무 함부로 차지 말라고 뒤에서 누가 부르는 듯하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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