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소설
기억이라는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소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07 2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기억한다는 건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것과 다른 것이다. 어떤 관계의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차단하기 위해 기억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문학동네.2014) 는 그런 소설이다.

  소설가가 된 남자 보스망스는 사십여 년 전 기억을 찾아 파리로 온다. 청춘의 민낯을 마주하는 이십 대의 시절로 말이다. 그가 찾아야 할 기억 속 여자 마르가레트. 기억 속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남자를 기억해야만 했다. 기억과 기억이 마주하는 순간 진짜 기억과 조우할 수 있을까? 소설가 보스망스는 진짜 기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기억 속으로 돌진한다.

  자신과 닮은 존재를 한눈에 알아보듯 보스망스의 눈에 비친 마르가레트의 불안은 익숙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나는 과거의 남자를 떠나 다른 삶을 찾는 마르가레트와 존재 자체가 고통이었던 어머니와 신부로부터 영원히 분리되고자 원했던 보스망스는 새로운 미래라는 같은 목표를 지녔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둘은 서로에게 절대적 존재가 되었다. 온통 낯선 사람들 속에서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청춘의 몸짓은 보스망스의 기억 속에 흐릿하면서도 선명하게 남았다. 얼마나 간절하게 새로운 삶을 원했는지 말이다.

  관계를 맺고 확장하는 일이 두려운 마르가레트에게 보스망스는 유일한 지속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끝내 온전한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린다. 사십여 년 전의 마르가레트를 찾는 보스망스의 여정은 사랑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때 잃어버린 미래이자 지평인지도 모른다. 곁에 있어도 사라질 것 같았던 존재를 이제는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열망 같은 것. 파리의 거리에서 그녀를 닮은 여자를 통해 과거를 추억하는 게 전부라 할지라도.

  ‘보스망스는 걸음을 멈추고 여자가 센 강 방향으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저 여자를 쫓아간들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같은 시간의 통로를 지날 것이다. 그러면 이 신시가지에서 우리 둘은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137쪽)

  현재를 사는 우리는 삶이 과거가 되었을 때 정확히 그것을 볼 수 있다. 그제야 대면할 용기를 지닌다. 그 시절을 통해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나가지 못한다. 기억이라는 상처를 견디고 벗어났을 때 가능하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평을 향해 발을 딛는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이 기억이라는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미래…… 지금의 보스망스에게는 날카롭고도 신비로운 울림을 주는 말.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한 번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있었다.’ (170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