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소설을 읽은 독자가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성공한 글이다. 내용이나 주인공의 성격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첫 문장이어도 마찬가지다. <이방인>의 ‘엄마가 죽었다’ 처럼 말이다. 김유진의 <숨은 밤>(문학동네.2011)이 그렇다. 소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의 연속이다. 안개를 지나 온 듯 축축하고 그림이 된 물고기들이 가득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다. 글이 지닌 묘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마을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먹물이 화선지의 결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듯, 안개는 서서히 몸체를 불려 사물의 경계를 흐렸다. 땅이 잘 보이지 않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물방울들이 머리카락과 눈썹 위에 내려앉았다. 양쪽 볼을 적셨다. 무성하게 자란 여름풀들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여름은 소란스러운 계절이었다. 땅을 뚫을 듯 거세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자, 안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짙은 안개 뒤에 몸을 숨긴 나무와 풀은, 장마가 지남과 동시에 앞가슴을 잔뜩 내민 비둘기처럼 기세등등하게 제 잎사귀들을 볕 아래 널어놓을 것이었다. 수풀은 우거지고 녹음이 질 것이었다.’ (104쪽)
‘굳게 잠겨 있던 안의 방 안에, 바다가 있었다. 벽 한가득,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가 함께 유영하고 있었다. 다 자라 강물을 향해 주둥이를 들이밀고 물길을 거슬러오르는 은어떼, 알이 차 배 부분이 타오를 듯 붉은 송어, 죽은 낯빛 같은 푸르른 등을 가진 벵에돔, 그 사이를 지나는 날렵한 몸체의 학공치떼와 그림자인 듯 희미하게 흔들리는 수초들, 제 몸보다 긴 수염을 가진 새우들이 그곳에 있었다. 비늘 하나 놓치는 법 없이 섬세한 유영도였다. 어탁 가까이 손을 가져가보았다. 입을 벌린 물고기들은 말이 없었다. 물속 깊이 몸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다시는 떠오르고 싶지 않을 만큼, 안온했다.’ (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