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떠오르는 에쿠니 가오리
가을이면 떠오르는 에쿠니 가오리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10.24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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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거 건조한 슬픔이 가득한 소설

 [북데일리] 소설에도 유행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 가장 유행인 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다. 그리고 계절마다 떠오르는 소설도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소담출판사. 2003)는 가을과 닮았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 리카가 있다. 7년 동안 사랑했고 한 공간에 살았던 남자 다케오는 자연스럽게 리카를 떠났다.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출근을 하듯 일상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여자는 남자와 전화를 하고 가끔은 밥을 함께 먹고 건강과 생활비를 염려한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이별은 차갑거나 뜨겁지 않다. 그저 담담하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나 헤어진 그들을 적당히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감정 깊은 곳까지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둘은 오랜 연인이었다. 다케오의 사랑이 하나코에게 향했을 때에도 리카는 다케오를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 한다. 그래서 추억이 있는 집을 떠날 수도 없었다. 월세를 충당하기 위해 주말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공간을 지키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 하나코가 리카와 함께 살겠다고 찾아왔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여자가 과거 남자친구의 현재 연인과 동거를 하고 싶겠는가. 경제적인 이유와 다케오와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던 리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나코는 리카를 방해하지 않았다. 둘은 나름대로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다케오는 종종 만나는 듯했지만 하나코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떠나고 싶으면 떠났고 다케오를 의식하지 않고 다른 남자들과 어울렸다. 그런 하나코를 리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케오가 안쓰럽기도 했다. 하나코가 다케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코는 모른다. 이때 나는 확신했다. 한 남자와 인생을 공유할 때의 흔해빠진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행복, 믿지 못할 기적 같은 순간의 축적. 예를 들면 겨울 아침, 다케오 옆에서 당연한 일이듯 눈을 뜨는 것. 차가운 발을, 건장하고 따스한 생명력에 넘치는 다케오의 발에 휘감을 때의 안심감. 뿌연 유리창.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몇 분.’ (130쪽)

 이 소설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인물은 하나코와 리카 중 누구일까? 에쿠니 가오리는 하나코의 상실과 상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녀가 왜 많은 남자를 만나며 살아가는지, 얼마나 외로워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고 1년 넘는 시간을 하나코와 산 리카도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하나코가 무엇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나코는 내가 숨 쉬는 공기에 녹아 가득가득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공기는 한천처럼 딱딱해서 창문을 열어도 바깥공기의 침식을 받지 않는다. 하나코가 없어도 내가 느끼는 방의 온도와 습도는 늘 일정하다.’ (248~249쪽)

 <낙하하는 저녁>은 매우 감각적인 소설이다. 얼핏 삼각관계의 진부한 설정처럼 보이지만 그저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쓸쓸한 슬픔이 가득한 소설이다. 심지어 그 슬픔은 차분하고 건조하다. 이별을 했어도 일상엔 커다란 변화가 없다. 어떤 이별로 남겨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아픔도 부서지고 만다. 어떤 이별은 지워지지 않을 무늬를 새기기 때문일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만이 쓸 수 있는 사랑 이야기와 함께 가을을 보내는 건 어떨까?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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