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황톳길의 3색 묘사
[책속의 명문장] 황톳길의 3색 묘사
  • 신현철 시민기자
  • 승인 2014.10.07 1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하운, 김지하, 정유정의 예문

[북데일리]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 한하운, <전라도 길 (부분)>

황톳길에 선연한 / 핏자욱 핏자욱 따라 / 나는 간다 애비야 / 네가 죽었고 /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 두 손엔 철삿줄 / 뜨거운 해가 /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 나는 간다 애비야 / 네가 죽은 곳 /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김지하, <황톳길 (부분)>

두 시의 공통점은 황톳길이다. 한하운 시인의 황톳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느낌이다. 비는 오지 않고 습도가 높아 숨이 턱턱 막히는 길을 걸어간다. 잠시 그늘에 앉아 쉬면서 신발을 벗었더니 발가락이 잘려나갔다. 마치 발이 황토흙같이 연상이 된다. 알다시피 한하운은 문둥병 시인이다.

반면에 김지하의 시는 황토색, 붉은색, 검은색, 흰색이 대비를 이루며 긴장감을 준다. 황톳길은 민중이 걸어가는 역사이다. 그의 시는 거친 민화 풍의 걸개그림을 그렸던 민중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런데 황톳길에 대한 묘사의 압권은 정유정의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비룡소) 속의 글이다. 이 책은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당선작이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건 성글게 형성된 솔숲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지형이 험해진 게 아니었다. 비가 와서 험해지는 길이었다. 이스트를 잔뜩 넣은 빵 반죽처럼 비에 젖어 퉁퉁 불어 오르는 길. 싯누런 황톳길 말이다. 맨몸으로 걷는 거라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진흙탕에 발 딛지 않고 길가 숲을 타고 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겁고 덩치 큰 수레를 밀고 끌며 가는 처지였다. 웅덩이를 넘어갈 땐 누런 황톳물을 온몸에 뒤집어썼고 막 물러지기 시작한 진흙 바닥을 디디면 발꿈치가 쭉 미그러졌다. 이미 찔꺽하게 물러져 버린 진구렁은 발목과 수레바퀴를 틀어잡고 놔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왜 이 길을 가리켜 신발 도둑이라 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290~291쪽

특히 비를 머금은 황톳길은 진구렁이 되어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 애써 발을 빼도 신발이 쏙 벗겨져 맨발이 되고 만다. "이스트를 잔뜩 넣은 빵 반죽처럼 비에 젖어 퉁퉁 불어 오르는 길"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경찰에 쫓기는 주인공 일행의 다급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두 시인이 황톳길을 뜨거운 더위와 연관을 시켰다면 정유정은 진구렁의 황톳길을 소설에 가져다 썼다. 상투적이지 않은 이런 생생한 묘사가 정유정의 천재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