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딛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상처를 딛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9.23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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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소설 <그랑 주떼>

 

[북데일리]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20~30대 젊은 독자들의 공감대를 끌어낼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명훈에 이어 김혜나의 소설 <그랑 주떼>(은행나무. 2014)이 두 번째다.

 주인공 ‘나’는 동네 무용원의 발레 강사다. 전문적인 발레 수업이 아니라 자세 교정이나 체중 감량을 위해 수강한 수강생을 가르친다. 원장 대신 수업을 진행하고 학원을 청소한다. ‘나’는 발레를 하기에 좋은 신체 조건에 비해 춤을 추지 못했다. 연습을 하고 동작을 익혀도 춤은 늘지 않았다. 결국 발레리나가 아닌 발레 강사일 뿐이다.

 소설은 얼핏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한 청춘의 절망에 대해 들려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치원 아이들이 도착하면서 ‘나’는 흔들린다. 작고 여린 아이들의 몸짓을 통해 여덟 살에 성폭행을 당하고 고모네 오빠까지 몸을 더듬었던 잔혹한 기억과 대면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울부짖는 예정에게 어른들은 윽박지르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다짐만 받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발레와 리나는 가장 큰 위로였다.

 열다섯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한 건 친구 미국에서 온 전학생 리나 때문이다. 약간의 사시 때문에 왕따를 당하던 자신에게 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리나가 다니는 무용원에서 발레 선생님에게 큰 발과 높은 발등 칭찬을 듣는다.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던 칭찬, 그것이 발레와의 첫 만남이었다. 가냘프고 하얀 발레 소녀 리나와 있으면 모든 게 좋았다.

 ‘너랑 있으면 꼭 아주 따스하고 평화로운 물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어. 이 모든 세계가 s를 안아주는 것만 같았어. 그럴 때면 나는 진짜로 쉴 수가 있었어.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 예정아. 스스로 너를 너무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에게 자꾸만 상처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좀 더 예뻐해 주면 좋겠어……’ (60~61쪽)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들려줄 수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마저 상처받을까 겁을 내고 손을 놓고 만다. 점점 커지는 가시를 숨긴 채 어른이 된 ‘나’는 이제야 그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저 자신도 환한 아이였고 그 빛을 감추는 법을 알지 못한 연약한 아이였다는 걸 말이다.

 ‘아이들의 생김새는 모두 달랐다. 몸이나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 어깨, 가슴, 겨드랑이, 배꼽, 허벅지, 종아리, 발가락…… 심지어 피부 색깔까지도 모두가 다 달랐다. 그러나 그 어던 아이도 밉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다, 저마다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빛을 감추거나 숨기는 법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아이들 모두가 다 저마다의 빛으로 홀연히 빛났다. 아주 어렸던 그때의 나에게도,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빛이 존재하고 있었을까? 흘러나오고 있었을까?’ (124~125쪽)

 무거운 소재인 성폭력과 왕따를 다뤘지만 상처와 슬픔을 무척 아름답고 섬세하게 다룬 소설이다. 가만히 다가와 슬픔을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비밀 상자를 매어놓은 끈을 풀어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곁에 있을 거라고. 이제 높게 날아오르라고 응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중으로 날아올라 두 다리를 일자로 벌리는 발레 동작인 ‘그랑 주떼’는 아주 완벽하고 멋진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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