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물은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책속의 명문장] 물은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9.23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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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그랑 주떼> 중에서

[북데일리] 절망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김혜나의 <그랑 주떼>(은행나무. 2014)는 발레를 통해 자신 속에 감춰져 있었던 내면의 상처를 응시하고 극복해내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은 통증보다 강한 고통으로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 상황을 묘사한 글이다. 점차적으로 확대되는 문장을 통해 얼마나 간절한지 보여준다.

 ‘양동이 속 얼음물의 차가운 기운이 먼저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양발을 양동이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물은 곧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내 몸을 찌르기 시작했다. 차갑고, 시리고, 아팠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섰다. 곧이어 위아래 잇몸까지 덜덜 떨렸다. 얼음물의 차가운 기운이 귓바퀴와 정수리까지 파고들었다. 온몸이 다 시리고 아파서 나는 당장에라도 발을 빼내고만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참고 싶었다. 너무 차갑고 괴로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까지, 모든 생각이 다 사라질 때까지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눈물이 쏙 빠져나올 것만 같아 아프고 괴로운 지금 이 순간만이 나에게 남게 될 때까지.

 얼음이 녹자, 물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와 동시에 내 몸 또한 점점 더 커다란 한기에 휩싸였다. 얼음물 속에 담근 두 발은 피를 모두 빨리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났다. 하얗던 발이 갑자기 시뻘겋게 변했다.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것은 결코 서서히 변하지 않았다. 그 순간이 지나면 물은 곧 불처럼 뜨거워졌다. 차갑던 것이 서서히 미지근해지거나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용광로 속의 물처럼 펄펄 끓어올랐다. 그럴 때면 곧 내 몸 전체가 다 불길에 휩싸인 듯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30~31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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