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에서 양반으로 '고난의 삶'
노비에서 양반으로 '고난의 삶'
  • 장맹순 시민기자
  • 승인 2014.09.2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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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사고 팔았던 조선시대

"옛날 강원도 정선(旌善) 땅에 한 가난한 양반이 관가에서 쌀을 빌려 먹으며 살아가는 처지였다. 그는 글만 읽고 놀 줄만 알았지 생산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그 환자(還子)가 1,000여 석이나 되어 갚을 길이 없자, 이웃에 살던 지체 낮은 부자가 그 빚을 대신 갚아주고 양반의 신분을 샀다. "(박지원의 '양반전')
 
 [북데일리] 조선시대에 양반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인구 절대다수는 평민이나 하천민이었다. 어느 노비 가계의 2백 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와 비평.2014)은 양반이 되려고 했던 노비 김수봉' 가계의 험난한 여정을 추적한 이야기다.
 
 저자는 노비들이 살았던 당대의 '호적대장' 을 통해 경상도 단성현에 사는 김홍발을 찾아낸다. 그의 조부였던 김수봉이 노력한 결과 평민이 되고 나중 증손자 대에서는 양반이 되는 과정을 찾아낸다. 저자는 노비들에 대한 기록이 많지만 현존하는 호적의 양의 많지 않고 호적 전체 인구가 다 실려 있지않아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 했다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조선시대 평범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호적만큼 방대한 자료도 없다며 조선사 생활사 이야기를 다양하게 소개한다. 특히 기혼 여성들의 호칭 차이, 노비의 현실과 양반의 집착, 노비에게 붙여진 이름에 담긴 사회적 천대와 멸시, 노비를 소유한 노비, 성씨와 본관의 획득 과정, 조선시대 일상의 세밀한 풍경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조선시대 노비는 신분제의 속박에 따라 대대로 주인 집안에 예속된 소유물이었다. 주인들은 그들의 삶보다는 그들이 지닌 경제적 가치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이처럼 노동력 착취, 천대와 멸시 속에서 당시 노비들의 비천한 삶에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지기도 했다.

 자신이 처한 신분적 억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 받거나 비루한 삶을 벗어나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망을 가기도 했다​. 그 중 저자가 집중해서 다룬 방식은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합법적인 면천을 통해 재물을 모아 돈을 내고 양인의 신분을 살 수 있었다. 

​ "노비들은 주인에게 신공을 바치는 틈틈이 토지를 경작허거나 상업,수공업에 종사해 재산을 늘려갔다. 그들은  크게 보면, 주인집에서 제공하는 식량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부류, 주인의 토지를 경작해 절반을 자신의몫으로 확보하는 부류, 주인과 관련없는 자신의 토지나 남의 토지를 경작해 살아가는 부류로 나눈다. 수봉은 주인집 인근에 거주했으므로 기본적으로 주인의 토지를 경작했을 것이며, 호적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토지도 소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87쪽)

 책에 따르면 1720년 경상도 용천군에서는 전체 토지 가운데 약 10%를 노비가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경제력을 보유한 노비들이 속가(贖價)라는 돈을 내고 속량(贖良)할 수 있었고 또한 왜란과 호란, 의 전쟁경험을 통해 부족한 군인대신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신분 해방을 시켜 주기도 했다.

 이 밖에도 책에는 재혼을 포함한 결혼 풍습,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군역의 변질, 급격히 증가하는 양반 주호(主戶)의 비중 변화, 등 방대한 단성현호적의 자료를 통해 조선의 생활사와 200년 된 노비 집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저자는 노비 가족사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보여준다. 

 흔히 가난은 대물림 된다는 말이 있다.  이 책은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신분상승을 향한 의지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스펙을 쌓고 학력과 경제력에 힘을 쏟는 모습으로 대물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장맹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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