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영화로 시대를 추억하는 별미
액션 영화로 시대를 추억하는 별미
  • 북데일리
  • 승인 2007.03.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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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취향에 천격이 있겠느냐마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있다. ‘메탈리카’ 신드롬 가운데 ‘비치 보이스’에 대한 애정은 어쩐지 쑥스럽다. 와인 애호가 앞에서 소주의 미덕을 주워섬기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다. 플루트로 악기시험을 치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리코더를 부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삶과 죽음, 이데올로기와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넘쳐나던 시절 액션영화 마니아들의 심정이 이러했겠다.

넘치는 활력, 박력 있는 세계관, 짜릿한 시각적 쾌락을 담보하지만 결코 주류가 될 수 없었던 영화. 무림의 전설적 비기처럼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왔던 영웅의 활약상들. “뭔가 모자라고 말도 안되고 유치하지만 그 속에는 나의 유치하고 결핍된 바탕 같은 것과 일치하는 무엇”에 대한 은밀한 애착. <한국 액션영화>(살림출판사, 2003)는 액션영화 최고의 전성기인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에 대한, 지금은 영화감독(`킬리만자로`를 연출한 오승욱)이 된 한 소년의 사후적 진술이자 애끓는 러브레터이다.

방점은 ‘사후’와 ‘러브레터’에 찍힌다. 불완전한 기억이 수십 년 전의 경험을 온전히 기록할 리가 없다. 때문에 영화는 신화화가 되거나 탈락되기 일쑤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기도 한 <13인의 무사>에서 적룡의 죽음이 대표적인 예다.

“밀려오는 적들에게 상처 입은 적룡은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다리를 가로막고 서서, 숨이 끊어져도 절대 쓰러지지 않으려 발등에 창을 꽂고 창끝을 턱에 괴어 적들을 가로막아 서는”것이 아니라 그냥 서서 죽을 뿐이다. 기억의 왜곡은 시대도 마찬가지여서 당대의 엄혹함과 불합리함, 삶의 고단함들은 종종 노스텔지어처럼 아련히 비치기도 한다.

기억의 마모와 함께 기록의 정확성, 시대에 대한 통찰은 흐릿해져 간다. 이 흐릿함을 보완하는 건 액션영화에 대한 열광적인 애정이다. 간단없이 한 호흡으로 기록되어 있는 건 한 소년을 사로잡았던 작품, 장면, 사람, 그로 인한 기쁨과 실망, 그뿐이다.

저자는, 마치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운 듯 박진감 넘치는 어조로 매 영화, 매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요컨대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역사적’ 작품들을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만났는가, 그 작품들의 무엇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는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경험담인 것이다. 한국 액션영화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나, 그것을 ‘경유한’ 시대 읽기나, ‘알레고리’로서의 액션영화를 기대한다면 그저 낭패일 수밖에.

단지 읽는 것만으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날만큼 조악했던 한국의 액션영화들은 시대와, 그때를 살아내던 우리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불완전한 기억의 행보와 넓게 벌려진 행간이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각각의 추억들을 견인해 내었으리라. 하지만 말도 안되게 유치한 이 영화들은 당시 시대와 닮아 있다.

“바람만 불면 연탄가루가 날아오고, 새벽에는 기차소리가 들리고, 문둥이가 동상 걸린 발을 질질 끌며 밥을 얻으러 돌아다니고, 간질환자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어가고, 휴가 나온 군바리가 술에 취해 입에 거품을 물고 골목에 쓰러져 있고, 작부집 아들은 물총에 손님이 먹다 남긴 소주를 넣어 장난을 치고, 주정뱅이들이 밤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담장에는 어젯밤 가난한 누군가의 집을 털 술집 작부들이 노브라로 술집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담장에는 어젯밤 가난한 누군가의 집을 털었을 도둑놈의 똥이 한 사발 놓여있었던, 그런 결핍과 더러움의 세계...”

의족과 의수를 호쾌하게 휘두르며 복수를 감행했던 `팔도 사나이들`. 음모와 협잡의 밀림 속을 의리와 몸뚱이 하나에 기대에 헤쳐나갔던 `오사까의 외로운 별`. 악인들은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고, 말종 인간들은 사표를 썼던 그 영화들은 힘겨운 시대, 추잡하고 결핍된 그 세계의 반어이자 반영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경험한 세대에게 <한국 액션영화>는 향수와 슬픔의 변주곡이겠지만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키치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전유하는 방식은 제각각일지언정 확실한 건 읽는 재미다. 시간과 공간, 세대와 연령을 초월하는 쾌감이라니. 하긴, 사실 그것이 액션의 매력이 아니던가.

[조헌수 기자 pillarcs3@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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