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조 소설집 <수박> 중에서
[북데일리] <수박> (작가정신. 2014)은 잘못된 ‘관계’로 인해 삶이 불행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중 <가족사진>에는 ‘작은언니’ 결혼식에 쓰일 사진을 찍기 위해 가족들이 놀이동산에 가는 날 풍경이 그려진다. 특히 아버지의 초상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릿하면서도 씁쓸하다
"아버지가 멋쩍어 하면서 돌아섰다. 아버지의 등이 흐릿했다. 아버지에게도 먼지가 되는 방법을 알려줄까.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투명한 목소리를 가졌다. 그러다 몸까지 투명해질까 봐 걱정된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나만 들을 수 있다.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다정하게 이야기해도 나 말고는 듣지 못한다. 아버지의 말은 암호화되어 있는 것일까. 아버지가 밥 먹자, 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안단테 피아니시모’로 들리는지도 모른다. 음악 기호를 모르는 사람들은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처럼.
아버지가 손톱깍이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된장찌개가 맛있다고 말해도 ‘안단테 피아니시모’라고 들린다면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의 입을 본다. 아버지가 말하면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입 모양을 따라 간다. 잘 들려요, 아버지. 크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p.155~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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