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 엉덩이에 몽고반점? 야릇한 상상
처제 엉덩이에 몽고반점? 야릇한 상상
  • 북데일리
  • 승인 2007.03.0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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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항상 인간이란 존재의 내면을 후벼 파는 글을 읽고 나면 체력이 바닥나는 느낌을 받는다. 일련의 에피소드의 나열이나 호감 가는 상상력이 아닌 마음속 어딘가 고여 있을 법한 검은 우물에 돌을 던지는 글. 불쾌하지도 않지만 유쾌하지도 않은 그런 알 수 없는 돌을 말이다.

중편 정도의 분량을 시원스럽게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작가의 깔끔하고 수려한 문장과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전개에 있다. 온갖 캠핑도구를 우겨넣은 큰 배낭을 짊어지고 오르는 등산길이 아닌 조그마한 힙색에 생수병 하나 넣고 가는 산책길과도 같은 느낌. 특히 소설 전반에 걸친 화려한 색감과 심리의 묘사 등은 쓸데없는 비유를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간결하지만 의미가 있는 문장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자극적이고 조금은 기이한 소재를 녹여 만든 무거운 이 소설 <몽고반점>(문학사상사. 2005)에는 경쾌한 템포가 흐른다.

이미지와 그 본연의 색채를 통한 예술의 탐닉

소설 속의 ‘나’는 처제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듣는 순간 그것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힌다. 그의 망상과 집착은 도덕적 잣대로 옳다 그르다 잘라 말하기 전에 보통의 인간으로서 누구나 겪고 있는 갈증이 아닐까싶다. 자기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아니, 어쩌면 알아채지 못하게 꼭 묻어둔 갈증이 하나로 모여 소용돌이 쳐가며 끝없이 응집되는 이미지의 몽고반점. 그런 갈증은 드러나고 아니고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 내면의 공통성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처제의 몽고반점에 대한 이미지를 갈망하다 걷잡을 수 없는 성욕에 휩싸여 교합을 하게 되는 것을 단순히 성욕 혹은 금기시되고 억압된 것들에 대한 호기심으로만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몽고반점에 대한 갈망은 성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식물성의 그것, 즉 본연의 것에 대한 것으로 기존의 시간을 잠자고 있던 무의미한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예술적인 자극이 된다.

비디오에디터인 ‘나’는 처제와 그녀의 몽고반점을 통해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태고의 이미지 즉, 그저 흰 도화지의 붉은색 포스터 칼라가 아닌 흰 와이셔츠의 피 빛과 가지각색의 물감 색이 아닌 식물과 꽃의 색이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그동안 답습해온 색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살아있는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에도 꽃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색을 넣고 처제의 꽃과 교합하게 된다. 그것을 작가는 근친상간의 추악한 결말이 아닌 주인공이 그토록 갈망하던 예술적 초조함의 종지부를 찍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례적이지 못한 그녀에 대한 갈망

그의 예술적인 모티브가 되는 그녀, 처제는 이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언뜻 보면 미친 여자로 혹은 일상에 초탈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 일반적인 세상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의 고군분투를 겪고 있는 그녀는 꿈속에서의 본 얼굴 때문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 그러한 그녀는 억압 앞에서 손목을 긋는 나약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강한 인물이다. 고기를 먹으며 이례적인 것에 익숙한 인간들 앞에서 그녀는 그저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주인공의 예술적인 이미지에 모티브가 되는 강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의 몸에 식물성의 흔적을 찾아 그것을 비디오로 촬영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찾는 반면, 그녀는 자신의 몸에 그려짐으로 편안함을 얻는다. 그녀가 형부인 그와 교합을 하게 되는 것 역시 육체에 대한 욕구의 발로가 아닌 그의 몸에 그려진 꽃에 대한 강렬한 흥분 때문이다. 그 흥분의 끝은 단순한 교합 뒤의 느슨함이 아닌, 자신을 괴롭혀 왔던 얼굴로 부터의 편안함이었다.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이례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 또는, 주류와 비주류로 양분되는 소속에 대한 이동은 아닐 것이다. 그가 찾는 것은 남들과는 다른 특이함이 아니라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것에 대한 소유욕에 가깝다.

한강의 배에서 본 풍경

몽고반점의 소재인 기이한 성적 상상은 지금에 와서는 그리 특이하지 않다. 성이라는 소재와 그에 따르는 금기시 되는 것들에 대한 표현, 그런 것을 소재로 한 소설은 이제는 상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흔하지 않은가. 때문에 성에 대한 소재는 글을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앞서의 말에서처럼 이 글을 읽으며 느낀 문장의 깔끔함이나 정열적인 이미지에 대한 묘사는 자칫 그 소재로 인해 가려지고 퇴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진부한 시시비비를 잠시 뒤로 미루면 아름다운 문장이 있고 잊지 못할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소 문제적인 소재는 제자리를 찾는 듯 보인다.

작가 탄 배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그 배가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알 수 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배에 잠시 동승하여 잊지 못할 풍경을 보고 내린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광준 시민기자 yakwang79@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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