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 안에 내가 죽는 것
사랑은 그 안에 내가 죽는 것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3.04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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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은의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

 [북데일리] 사랑이라는 테두리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랑은 저마다 간절하고 아름답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눈물로 피어난 꽃이라 해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사랑도 깨지고 무너진다. 그러므로 사랑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여기 평생 한 사람을 바라본 사랑이 있다.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 서영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2014. 해냄)가 그것이다.

 소설은 주인공 강호순이 오랜 연인인 박 선생의 아내가 죽자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승이자 연인의 아내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호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박 선생과 호순의 관계는 여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전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거대한 집에서 부부이면서 부부가 아닌 채로 살아가는 삶은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문 것과 같았다.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강하게 보호하던 남자가, 몇 겹의 문과 자물쇠로 자신의 것을 세상한테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힘겨운 것이었다.

 온전히 호순을 속박하려는 박 선생과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소박한 삶을 꿈꾸는 호순은 때로 충돌하고 부딪힌다. 승자는 언제나 박 선생이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사랑한 남자였기 때문일까. 그런 완고한 노인의 모습을 호순은 때로 안타깝게 때로 가엽게 여긴다. 함께 하기 위해 긴 시간을 아파했지만 정작 같은 공간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노인과 그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서영은은 호순과 박 선생의 일상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장면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집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나열하듯 말이다. 마치 단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될 아주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 강조하듯 그려낸다. 어쩌면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일지도 모른다.

 ‘저 먼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에게서 비롯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실핏줄처럼 다시 자기에게로 귀결되는 그 인과(因果)의 가차 없는 꼭짓점이 바로 자신의 가슴 한복판에 있었다니!’ 113쪽

 여전히 가족이 아닌 아버지의 여자로, 타인처럼 대하는 남편의 자식들과 친척들, 세상의 시선을 호순은 담담하게 여긴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에 정해진 대로 살았던 남편을, 자신과의 관계를 알면서 인정했던 전처의 진심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서로의 곁에 머물러 사랑한 시간보다 기다린 시간이 몇 배나 많았을 사랑이다.

 ‘같은 사람을 두고 서로가 다른 인연의 매듭을 엮었다 풀고 가는 인생 밭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디만큼 왔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인연이란 먼저 난 자가 나중 난 자에게 주는 미션이다.’ 227쪽

 운명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하지만 서영은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풀어낸 자신의 이야기지만 시종일관 담담하다. 치열하게 사랑했던 순간, 불꽃처럼 타올랐던 감정들도 아주 차분하게 들려준다. 하여, 어느 순간 폭발할 감정을 누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가슴이 뜨겁고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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