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장] 몸은 무수히 많은 창...
[명문장] 몸은 무수히 많은 창...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2.13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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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 명문장]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중에서

[북데일리] 어떤 문장은 말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시인 김혜순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문학동네. 2002)중 다음의 글도 그러하다. 글을 읽은 후 내 몸을 훑어본다. 심지어 몸이 하는 말을 듣고 싶어진다.

 ‘몸은 하나의 조직이지만 무수히 많은 창을 가진 열려진 집합이다. 그 창 속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머니가 하나씩 매달려 있다. 그 창에는 각기 다른 식구들이 살고 있다. 심지어 몸 속에 어두운 계단들과 비상구들을 숨긴 도시의 빌딩처럼.

 몸 속은 각 마디들과 주머니들, 자신들끼리의 매체들로 서로 연결된 미로와 같다. 그 주머니들과 마디들은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욕망들의 지도를 따라, 핏줄이 돌고 기가 돈다. 욕망은 스스로 지도를 그린다. 그 지도의 선들은 순간의 소생을 위해 쉴새없이 그어진다.

 몸 속은 신화가 그린 지도의 현현된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각각의 신들은 하나씩의 주머니와 마디들과 길들을 지배한다. 미궁 속의 미노타우로스는 다른 곳이 아닌, 몸 속으로 들어간 황소였을 것이다.

 몸은 욕망한다. 욕망은 결여이며,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현실적 생산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몸은 욕망 때문에 만물의 덫이 된다. 이 덫에 걸리면 만물은 갇히는 신세가 된다. 매순간 몰락하는 현재도 이 덫에 걸려 넘어진다. 만물과 현재는 몸이라는 이상한 창고, 이상한 공장, 이상한 미궁에 갇힌다. 그리하여 결국 과거는 몸의 것이 된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 바로 과거로 가버린 것들이 신경섬유, 신경세포, 뇌하수체 속에서 숨을 쉬게 된다. 그리하여 몸은 추억과 과거의 미궁으로 등극한다. 그 속에, 무수한 창들 중 어느 곳에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갇힌 과거가 내지르는 욕망, 그 욕망에 찬 언설이 미래를 잡아챈다. 다시, 만물이 몸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욕망 때문에 무수한 대화의 창구를 열게 되는, 몸의 역설적 은폐와 개진이 이루어진다.’ (251,252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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