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서른세살' 처녀 홍도 이야기
'사백서른세살' 처녀 홍도 이야기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11.18 1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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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대현의 <홍도>

[북데일리] ‘홍도는 죽지 않았다.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도 홍도는 죽지도 않았다.’ 287쪽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남들과 거꾸로 흘렀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시간을 산다는 건 특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나의 시간 속에 소중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겁의 생을 산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김대현의 장편 소설 <홍도>(2013. 다산책방)는 어땠을까? 1580년에 태어나 2013년까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사백서른세 살을 산 홍도,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소설은 스물일곱 살 청년 동현이 헬싱키에서 인천까지 오는 비행기에서 홍도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홍도는 동현이 정여립에 대해 조사한 공책을 발견하고 정여립을 죽도 할아버지라 부르며 외손녀라고 말한다. 동현은 사백서른세 살이라는 홍도를 믿을 수 없었지만 정여립에 대한 조사 차원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동계를 만든 정여립이 반역(기축옥사라 불리는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몰리고 그 여파로 홍도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슬픔의 눈으로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홍도는 기축옥사 때 정여립을 스승으로 모시는 천민 자치기가 어떻게 자신을 살렸는지, 임진왜란 당시 왕의 자녀들과 일본으로 끌려갔을 때 선조의 딸 정주옹주와 자신을 뒤바꿔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정주옹주를 찾았지만 옹주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택한다. 조선으로 돌아와 운명처럼 정여립의 뜻을 이어 대동촌을 꾸린 자치기와 만난 혼인을 한다. 홍도는 아이를 낳다가 죽음 대신 영원한 생을 얻는다. 항아 라는 노파가 홍도를 살린 것이다. 그 뒤로 홍도는 늙지도 죽지도 않았다.

 동현은 점점 홍도에게 빠져든다. 꾸며낸 이야기, 거짓이라 해도 좋았다. 동현뿐 아니라 독자도 그렇다. 홍도가 직접 경험한 역사적 사실은 또 무엇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한 것이다. 늙지 않는 외모 덕에 홍도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 천주교를 믿는 청년으로 환생한 아버지를 만난다. 절대로 홍도를 기어할 수 없는 아버지였다. 어디 그뿐인가, 홍도는 서양인으로 태어난 정주옹주와 만난 사랑을 나눴고 그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살기도 했다.

 사람은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이 홍도와 그들을 이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동현으로 태어난 자치기를 만난다. 동현이 홍도에게 끌렸던 이유도 같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세상은 변했습니다. 어찌 보면 변해야 하는 것이 세상인 듯도 싶습니다. 산도 강도 바다도 초목도 그곳에 깃들어 사는 뭇짐승들도 모두들 변해왔으니 사람인들 어찌 변하지 않겠습니까? 말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모양새도 변하고 참으로 많이도 변한 것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변하는 세상에서도 오롯이 이어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인연이더군요. 산하고도, 강하고도, 바다하고도, 초목에 뭇짐승들하고도, 하물며 물건들하고도 이어지는 것이 인연입니다. 하니,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인연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382쪽

 사백년을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온 여자와 현재를 사는 남자의 운명적 사랑 이야기, 소재만으로도 정말 흥미롭다. 거기다 몇 줄의 기록으로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끌어온 건 지나친 설정이라 볼 수 있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몇 백 년의 과거를 기억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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