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소중한 내 시간들아
안녕, 소중한 내 시간들아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07.22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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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장편소설 <안녕, 내 모든 것>

 

[북데일리] <추천> 같은 시대를 산다는 건 추억을 공유하는 일이다. 유행하는 문화를 함께 즐기고 놀라운 사건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함께 한 친구는 특별하다. 비밀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방패가 되어주는 친구가 있어 힘겨운 시간을 견딜 수 있으니까.

 정이현의 장편소설 <안녕, 내 모든 것>(2013. 창비) 속 지혜, 세미, 준모도 그랬다. 의지로도 제어할 수 없는 뚜렛 증후군을 앓는 준모, 잊고 싶어도 한 번 본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가진 지혜, 엄마와 아빠의 이혼으로 부유한 조부모의 집에 짐처럼 맡겨진 세미는 삼총사였다. 중학교 때부터 언제나 함께였다. 그들이 지나온 1990년대는 놀라운 사건이 많았다.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졌고 김일성이 죽었다. 정이현은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1990년대 서울의 강남을 복기시킴과 동시에 혼란스러웠던 십대의 감정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세 아이들의 이야기는 세미가 화자가 되어 들려준다.

 ‘스무살이 되는 해는 1997년이다. 가깝지만 머나먼 숫자였다. 유리잔 밑바닥에 남은 우유 찌꺼기처럼 희뿌옇고 탁했다. 1988년에는 1991년이, 1991년에는 1994년이 그렇게 느껴졌었다. 시간은 늘 체력장 오래달리기 같았다. 눈을 감고 뛰다보면, 저 앞에 도무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속도로 달리던 아이가 어느 순간 내 뒤로 처져 있는 거다. 늙어간다는 건 따라잡을 아이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아무도 없어진다는 거겠지. 앞만 보고 뛰는 일도 뒤를 돌아보는 일도 두려울 것이다. 그러면 좀 쓸쓸할 것 같기도 하다.’ 63~64쪽

 입시로 기억되는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이 되는 것보다 스무살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꼈을 때다. 세미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조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나이였다. 세미는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집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고모마저 사랑이 아닌 학벌을 택해 결혼을 하자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빠는 새 여자를 대동했고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 안은 엉망이 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교수 부모를 두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지혜와 점점 심해지는 뚜렛 때문에 유학을 결정하는 엄마를 따라야 하는 준모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위한다는 이유로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마음을 기댈 곳은 어디기에 셋은 더 단단해지고 비밀을 나눠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불행은 틈을 주지 않고 들이닥친다. 해석하거나 납득하려 들 필요는 없다. 해석되지도 납득되지도 않는 것, 그것이 불행이 가진 본성이니까. 이상한 낌새를 채고 어, 어, 어쩌지, 하는 순간에 불행은 토네이도처럼 사정없이 휘몰아친다. 정신을 차려보면 움푹 꺼진 구덩이와 그 주변에 어지러이 널린 일상의 잔해뿐이다. 잔뜩 물때가 끼어 있는 불투명 욕실 슬리퍼 한쪽. 그런 것만이 우리가 간신히 목격할 수 있는 불행의 실체이다.’ 174쪽

 소설은 1990년대 강남 세태를 담았지만 90년대는 아릿한 어느 시절을 꺼내오는 촉수로 충분하다. 그리하여 가슴 속 깊이 간직한 비밀 상자를 열게 만든다. 비밀 상자에 담긴 게 좋았던 추억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지나야 했던 시절의 상처나 잊고 싶은 기억 말이다. 정이현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게 아닐까.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게 새로운 기억이듯 감당할 수 없었던 과거의 시간은 살아갈 시간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안녕, 내 모든 것>이란 제목처럼 아프고 슬픈 것들과 안녕을 말해야 할 때다.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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