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여자는 침대 밑에서 살까
왜 그 여자는 침대 밑에서 살까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05.28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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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하지만 매우 독특한 소설

 [북데일리] 마른 발에 분홍색 발톱이 눈에 들어온다. 발목까지 내려온 건 치마가 맞을 것이다. 한데 그것이 치마가 아니라면? <침대 밑에 사는 여자>(2009. 살림)는 제목과 표지에서 묘한 호기심을 불러온다.

 우리는 대부분 사물의 앞모습을 본다.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외모나 목소리로 기억할 뿐이다. 상대의 내면을 보려면 관계를 맺고 지속되는 동안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하여 어떤 이는 스스로 관계를 끊거나 거짓된 관계를 원한다.

 주인공 린은 6개월 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을 한다. 세상은 여전히 두려운 곳이다. 그녀가 연락을 하는 사람은 엄마, 의사, 하인츠가 전부다. 하인츠의 소개로 호텔 메이드가 된 린은 열심히 일한다. 청소의 달인이라도 되려는 듯 작은 먼지도 용납하지 않는다. 린은 객실을 청소하면서 투숙객의 짐을 통해 그들을 상상한다. 우연히 손님의 파자마를 입어보다 발자국 소리에 놀라 침대 밑으로 들어간다. 묘하게도 침대 밑에서 린은 살아 있음을 느낀다.

 화요일마다 침대 밑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을 나누거나, 통화를 하거나, 혼자 텔레비젼을 보거나, 중얼거린다. 린은 침대 밑에서 평안을 얻는다. 린의 일상은 단조롭다. 호텔 출퇴근, 화요일엔 침대 밑,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엔 엄마와 짧은 통화, 금요일엔 의사를 만난다. 린에게 삶은 일곱가지 색깔의 반복이다.

 ‘일요일은 창백한 파란색, 월요일은 지저분한 흰색, 화요일은 달걀 껍질 색, 수요일은 잿빛 갈색, 목요일은 짙은 푸른색, 금요일은 진한 붉은색, 토요일은 새까만 검은색.’ (98쪽)

 그러다 손님에게 남긴 연락처를 훔친다. 토요일마다 그녀를 만난다. 함께 휴가를 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린이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거부한다. 다시 혼자가 된 린은 엄마가 있는 고향 집으로 향한다. 엄마와 린 사이는 여전히 불편하다. 둘 사이에도 침대라는 소통의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린은 생각한다, 엄마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엄마에겐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리에겐 서로의 감정을 통역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 사이에 앉아서, 내가 하는 말을 엄마의 세계로 통역해주는 사람, 그리고 엄마가 하는 말을 내 세계로 통역해주는 사람.’ 135쪽

 매우 독특하고 불친절한 소설이다. 짧은 글 속에 가득한 린의 생각만 숨표(,)로 나열한다. 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린의 간절한 독백을 전할 뿐이다. 어쩌면 린의 모습은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은 아닐까?

 ‘사물은,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우리에겐 사물의 절반은 항상 숨겨져 있어. 병에 든 생수, 연필, 램프, 그 모든 걸 우리는 절반밖에 보지 못해, 단지 앞에서, 비스듬하게 앞에서, 혹은 위에서, 절대로 완벽하게 보지 못해, 절대로 전체를 보진 못해. 진짜 모습, 사물의 완벽한 모습은 어둠 속에 있어. 우리 모두는 시야가 제한된 존재요. 물을 마시려고 물병을 잡으면, 물병의 뒷면이 있다는 걸 상상만 할 뿐이지. 그 뒷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거야. 뒷면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물을 마시는 거야. 그래서 우린 분명히 뒷면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물을 마셔. 더도 덜도 아니고.’ 111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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