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기행]<2>남한강에 흐르는 두 조선여인의 ‘한’
[열녀기행]<2>남한강에 흐르는 두 조선여인의 ‘한’
  • 김지연 시민기자
  • 승인 2013.03.1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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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희생양 여주 ‘장조이’와 ‘명성황후’가 주는 교훈

[북데일리] 이른 아침 집을 나와 경기도 여주로 가는 길. 고속도로는 희뿌연 안개로 가득하여 몇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리에 위치한 장조이 열녀비를 찾아 여주 시내를 헤매었다. 그러다 우연히 근린공원을 발견하여 혹시나 이곳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가지고 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넓은 공원의 입구로 들어가니 3월이라 봄 햇살이 따스한데 이상하게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한적하고 쓸쓸해 보이는 곳이었다. 열녀비를 찾아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 마침 청소를 하고 있던 영월루 근린공원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장조이 열녀비는 원래 여주교육청 맞은편에 있었으나 공원 한 곳에 여려 비석들을 모아 둔 장소에 옮겨졌다”고 한다.

장조이 열녀비
공원 오른쪽으로 높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한국전쟁 참전 기념 현충탑이 하늘을 찌를 듯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뒤편 공원의 끝자락 귀퉁이를 따라 오래 돼 보이는 듯한 비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여주군 내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가 영월 근린공원으로 옮겨진 15개 정도의 비석들은 여주 목사 선정비가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열녀비로 우뚝 서 있는 오래된 비석에는 '장소사 열녀비(張召史 烈女碑) 라고 새겨져 있다. 장소사는 장조이의 잘못된 표기다.

장조이라는 이름에서 조이는 한자의 우리말 표기법인 이두(吏讀)로 과부를 나타내는 말이다. 장조이는 여주 관아의 관리 윤응빙의 처로,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가기 전 영월루 아래의 마암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자결한 여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공원 꼭대기로 올라가니 영월루라는 누각이 듬직한 풍채를 드러내었다. 영월루는 원래 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신현태 군수가 현재의 위치에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영월루에서 탁 트인 주위를 둘러보니 앞으로는 남한강이, 건너편에는 여주군 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영월루에서 공원 아래쪽으로 내려와 표지판을 따라 장조이가 강으로 뛰어내렸다는 마암을 찾아 공원의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강변의 돌계단을 따라 걸어가니 오른편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암 절벽이 깎아지른 듯 하다.

영월루에서 바라본 남한강
샛길 막바지에 다다르니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의 암벽에 힘있는 필체로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고장 출신 이규보의 한시 중에 "두 마리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라고 읊은 내용으로 미뤄 마암은 역사성을 간직한 유적임을 가늠할 수 있다.

마암 아래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이 시퍼렇다. 소용돌이 치는 강물이 병자호란이라는 전쟁과 유교라는 사회적 굴레 속에서 희생을 당해야 했던 조선 여인들의 험난한 수난사를 대변하는 듯 했다. 지금으로부터 370여년 전 조선시대에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던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해 강물로 뛰어들어 죽음을 택한 수많은 ‘조선의 장조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영월루와 마암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고 난 후, 장조이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얻기 위해 여주문화원과 여주향토자료관에 문의를 하였으나 여주군사에 나오는 짤막한 자료 외에는 관련 자료가 없다고 한다.  열녀비와 관련된 증인인 윤응빙의 후손을 찾으려 했으나 이 역시 열녀비도 옮겨지고 당시 마을도 없어져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장조이 열녀비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아쉬웠던 점을 한 가지 더 들자면 열녀비와 마암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찾는 데에 시간이 걸렸었다. 나중에라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열녀비를 다른 선정비들과 섞어 놓지 않고 마암 부근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남한강변에 우뚝 솟은 마암
장조이 열녀비와 마암, 근린공원을 답사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찾았다. 명성황후 기념비라고 쓰여진 비석이 겨울바람에 뻣뻣해진 갈색 잔디밭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기와지붕이 낮게 내려와 있는 꾸밈없는 생가 모양새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자세히 집안을 살펴보니 'ㅁ'자 구조로 그리 춥지도 않은 지방에서 왜 답답해 보이는 닫힌 구조의 집을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더불어 사방이 막힌 이런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남모르는 한도 느껴지는 듯 했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태어나서, 장조이는 여주로 시집와서 각기 다른 역사의 시간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 하지만 명분만을 중요시 여기고 국방을 소홀이 하여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각 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비운의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겪었다는 면에서는 두 여성의 공통점이 보인다.

명성황후 생가 모습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조선시대 여인들은 장조이와 명성황후뿐만이 아닌, 수천 수만 명이 훨씬 넘게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시대를 절대적으로 지배한 유교라는 사상과 잦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들의 죽음이 과연 그 시대에 타인에 의해 정당하게 칭송될 수 있었는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는지에 대한 분노감마저 들었다. 이러한 죽음의 배경이 무엇인지, 왜 그러한 사회적 풍습이 만들어지고 강요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답사를 통해 찾아나가는 것이 열녀기행의 목적임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여행이었다.

<김지연 시민기자>(상명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2학년. 교내 영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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