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기행]<1> 10대 때 과부되어 '병든 시부모 봉양 한평생'
[열녀기행]<1> 10대 때 과부되어 '병든 시부모 봉양 한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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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2.1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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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만경 ‘평산신씨충효렬지비’, 지극 효성에 날아가던 오리도 떨어져

[북데일리] 징게맹게 너른들. 예로부터 사람들은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만경평야를 이렇게 불렀다. 호남평야는 김제평야를 말하는 것이고, 김제평야는 사실 만경평야를 두고 하는 얘기다. 

소설 '아리랑'에서는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고 만경평야를 노래했다.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전경. 만경들판에 봄이 오고 있다

설을 하루 앞두고 아직 겨울 바람이 차가운 2월 9일 오후 만경으로 향하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김제 시내를 벗어나자 쭉 뻗은 자동차 전용도로가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끝없이 이어졌다.

열녀기행의 첫 번째 여행지를 김제 만경 화포리 ‘평산신씨충효렬지비’로 택한 이유는 한겨울 몸이 불편한 시부모를 위해 갖은 음식을 마련해 정성으로 봉양한 조선시대 효부의 따뜻한 마음이 차가운 날씨를 녹여줄 것만 같아서였다.

유교에서는 효와 열을 중요시 여겼는데 말 그대로 효녀는 부모를, 열녀는 남편을 잘 섬기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평산신씨 역시 비석에 새겨진 것처럼 효와 열을 다한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어 처음으로 답사하게 되는 열녀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추워서인지 조그마한 마을에 사람의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고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 들리는 한적한 곳이었다. 동네 가장 왼쪽 끝에 자리한 평산신씨충효렬지비는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집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지어져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홍살이 있고, 주변은 돌로 지어진 담장을 낮게 쌓아 놓아 멀리서도 눈에 금방 띄었는데 낡고 쇠락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평산신씨 충효렬지비

비석에는 평산신씨충효렬지비, 측면에는 1971년 10월 24일 순백 독금 신효부 자 응빈 손 대혁 종손후록 현손 귀업, 5대손 종일 종이 종삼 종운, 6대손 환우 한우 영우 관우 동우 서우 남우 윤우라고 적혀있다. 후면에는 “이 정문은 우리 5대조모평산 신씨 충효렬을 현양하기 위해 철종 12년 나라에서 정문과 비를 세웠으며 이후 많이 훼손되어 정문을 5대손 종삼이 중수하고 이 비는 화포리 김종숙 여사의 독지에 의해 중건함”이라고 써있다.

충효렬지비 바로 옆에 있는 집을 찾아가 비문의 자손들이 사는 집을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마을 어귀로 나가려 하는데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손가락으로 열녀비가 있는 곳의 반대 쪽을 가리키면서 민일례 아주머니가 사는 댁이 그 후손이라며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마을의 중간 즈음 밭을 낀 길을 따라 들어가다 첫 번째 골목에서 전봇대를 끼고 우회하여 들어가면 두 번째 집 대문에 이환영(작고)씨 문패가 있다. 현관문을 두드리니 이 집 안주인인 민일례 할머니가 설 음식을 준비하다 놀란 눈으로도 반가이 맞아 주었다.

평산신씨의 내력에 대해 물으니 남편이 작고하고 시어머니 또한 연로하여 열녀비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모른다고 하였다. 다만, 당시 맹인인 시아버지와 앉은뱅이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한 겨울에도 잉어를 잡아오고 강둑에 나가 맛을 캐 오는 등 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아주머니는 이를 “평산신씨 어르신께서 시부모에게 드릴 음식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면 청둥오리와 잉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자랑스레 표현하였다.

그만큼 시어른을 모시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밖에 평산신씨 열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고, 그나마 있던 족보마저 분실하였다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방에 계시는 시어머니가 선조의 효행을 알 것 같으나 나이가 들어 제대로 기억해 낼지 의문이라며 손을 내저으면서 “사는 게 여의치 않아 옛날 일들을 보존하는 일에 신경을 못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겨울을 이겨낸 마을 입구 마늘밭이 파릇파릇 돋고 있다

다만 <만경향교지>와 <김제읍지> 등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만경의 하일도 진관포 어부의 딸(신성녀)로 태어나 농촌 출신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이독금(李禿金)의 처가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맹인이었고 시어머니는 앉은뱅이였다. 평산신씨는 팔자가 기구하여 남편마저 일찍 여읜 10대의 청상과부로서 시부모를 봉양하게 되었다.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한 친정 부모가 딸이 과부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음을 불쌍히 여겨 개가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평산신씨는 “내가 본래 빈천한 집 딸로 개가하는 데는 부끄럼이 없지만 시부모가 늙고 병들어 다른 자녀의 봉양도 없는데 어찌 개가하느냐”며 한사코 뿌리치고 평생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여 수절하였다. 그리하여 눈먼 시아버지를 봉양하는데, 날아가는 오리라든지 동절기에 잉어라든지 또 죽순이라든지 시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지성을 다하여 봉양한 후 일생을 마치자 나라에서 효부 열녀비를 세워 주었다. 평산신씨 충효열 정려는 1863년(철종14년) 겨울에 전라감사의 특명으로 세우게 되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기록에는 철종 14년인 1863년에 정려를 세웠다고 되어있는데, 화포리 충효렬지비에는 철종1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후손들이 쇠락한 정려(旌閭)를 중수하면서 연대를 잘못 기입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앉은뱅이와 맹인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꽃다운 나이의 여인 ‘신성녀’의 삶을 지금의 잣대로 함부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간혹 우리가 알고 있는 열녀의 생애가 무거운 유교문화에 억눌려 왜곡되고 변형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평산신씨는 분명 재혼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음에도 늙고 병든 시부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자발적 선택이 크게 작용한 듯 하다.

설 차례 준비 중 시간을 내준 평산신씨 후손 민일례 여사

당시 상황에서 여성이 재혼을 한다거나 다른 삶을 선택할 수가 없는 사회적인 제약이 분명히 작용했겠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가지는 인간적인 마음이 평산신씨에게 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남편을 여읜 후 남편을 따라 죽지 않고 시부모를 정성스레 봉양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 한 후 수절(守節)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 깊었다.

열녀기행을 시작할 때 관련 서적을 읽으며 “왜 조선시대 열녀들은 죽음으로써 이름을 남기게 됐는가” “과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을까” “열녀로서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렇다면 현대에 와서 열녀, 혹은 열녀문화는 과연 사라진 것인가” 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답사를 시작하였다. 비록 첫 기행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이 앞으로 찾아갈 열녀기행을 더욱 기다리게 만드는 듯 하다. 다음 여행지가 자못 기다려진다.

<김지연 시민기자>(상명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2학년. 교내 영자신문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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