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3부작’ 쓴 조앤 해리스의 맛있는 소설
‘음식3부작’ 쓴 조앤 해리스의 맛있는 소설
  • 북데일리
  • 승인 2007.02.2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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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며칠 전, 밸런타인데이가 감기몸살처럼 온 거리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남실대는 달콤한 물결에 폭 젖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주변의 몇몇은 이번엔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보겠다고 인터넷으로 초콜릿 덩어리를 주문하며 가열찬 의지를 불태웠고, 여자친구에게 커다란 초콜릿 상자를 받은 누구누구는 주위에 초콜릿을 인색하게 나누어주며 한껏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눈꼴시던지. 물론, 이렇게 말하지만 저 또한 얻어먹었습니다.

특별한 날을 챙기는 것보다 평상시에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저는, 오히려 이런 날에는 연인에게 오히려 데면데면하게 굴고 맙니다. 밸런타인에 연인에 대한 사랑보다 초콜릿이 더 먼저 튀어나가는 모양새가 어쩐지 못마땅해 부리는 심술인가 봅니다. 하지만, 결국 밤에 편의점에 들러 다크 초콜릿을 한 통 사 연인의 손에 쥐어주었으니 이거이거, 고냥씨의 굴욕인가요.

언제나 그렇듯 일정한 시기가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저는 겨울이 되면 행복해지려고 꼭 챙겨보는 영화 몇 편이 있는데, <러브 레터>(1995), <러브 액추얼리>(2003), <이터널 선샤인>(2004)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러분, 영화의 스토리만 생각해도 가슴이 따뜻해지지 않으세요?

밸런타인데이 때 역시 조건반사처럼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네, 많은 분들이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정말 유명해진 영화, 바로 줄리엣 비노쉬와 조니 뎁이 출연했던, 신비해서 더 달콤했던 영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초콜렛>(2001)입니다. 한동안 벨기에산 초콜릿의 마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을 때 봤었던 터라, 더욱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는 보고 나서도 그 마력이 꽤 오랫동안이나 지속되었지요.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릴 소설은 조앤 해리스의 <오렌지 다섯 조각>(문학동네. 2001)입니다. 아니, 초콜릿 얘기하다가 생뚱맞게 웬 오렌지냐고요? 다 연결고리가 있지요. 바로 조앤 해리스라는 작가입니다. 조앤 해리스라는 작가의 이름이 생소한 분들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던 영화 <초콜렛>의 원작 소설을 지은 작가라면 다들 아, 그렇구나, 하시겠죠? 영화도 영화지만, 원작 소설 <초콜렛> 상당히 흥미진진하거든요.

조앤 해리스는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 3부작(Food Triloy)`으로 이미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한 작가입니다. <초콜렛>, <블랙베리 와인>에 이어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품이 바로 <오렌지 다섯 조각(Five Quarters Of The Orange)>(2001)인데요. 저는 이 소설을 3부작 중 가장 인상 깊게, 그리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즐거웠던 연휴에 대한 기억과 여운을 정리하는 오렌지의 상큼함, 괜찮지 않을까요?

<오렌지 다섯 조각>은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예요. 노년이 된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은 많이 접해보셨을 겁니다. <오렌지 다섯 조각> 역시 노년이 된 화자가 유년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유물인 요리책이 단서가 되어 퍼즐 짜 맞추듯 이야기 전체를 짜 맞추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읽다보면 독자 또한 어느새 이야기 한 가운데 놓여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리나 나무딸기로 리큐르를 만드는 법이나, 잼을 만드는 법 등 프랑스의 브루타뉴 지방의 음식에 대한 정보와 레서피들이 이야기 곳곳에 군침 돌게 녹아 있습니다.

유년 시절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주로 담고 있으므로, <오렌지 다섯 조각>은 유쾌하다거나 상큼한 소설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둥근 오렌지의 온전한 모습이 주는 딱 오렌지 그만큼의 묵직함과 껍질의 은은한 향, 오렌지의 잘린 단면이 주는 새큼함이 잘 어우러진 소설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주인공인 화자가 정말로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수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예 매력적이거나, 숨은 매력이 있어서 나중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화자는 결코 예쁘지도, 성격이 좋지도 않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특유의 괴팍함을 지닌 그녀는 사사건건 어머니와 대립하고, 이러한 성격은 나이가 들어서도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까탈스럽고, 고집 세고, 혼자서 모든 일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못 말릴 정도의 독립적인 여성입니다. 독일 점령기에 유년기를 보낸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척박하고 불편한 환경에 대한 묘사 역시 잘 되어있는 소설입니다.

작가들은 참 기발한 소재들을 상상력을 가지고 잘도 접목시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국기게양대와 벌이는 로맨스라든가, 인간세상을 실눈 뜨고 바라보는 액자 속의 초록 망아지라든가, 곰보다 더 오래 자는 사람 등 보통 상상할 수 없는, 혹은, 상상만 하고 무심결에 지나치는 것들을 잘 포착해 소설의 거리로 멋지게 완성해냅니다. <오렌지 다섯 조각> 역시 오렌지와 두통을 매끄럽게 연결시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와 역량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짙은 오렌지 향을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었습니다.

작년엔가 이 소설을 읽고 퍼뜩 떠올랐던 작은 식당이 있었습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몇 해 전에 우연히 들렀던 이태원의 한 크레페를 파는 식당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거기도 프랑스 북서부 브루타뉴 지방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꼭 한 번 다시 들러봐야지 하면서 매번 미루게 되네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사과주의 맛과 블루치즈를 곁들인 메밀 크레페. 크레페를 만들던 분의 수려했던 요리사의 모습도 떠오르면서 흐음, 기회가 된다면 조만간 다시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쓰윽, 고개를 들이밉니다. 과연 그 때의 그 느낌으로, 지금도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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