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여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여
  • 북데일리
  • 승인 2007.02.1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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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세대 앞 〈정은서점〉 / 02) 323-3085 (http://jbstore.co.kr)

<1〉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여

[북데일리]햇볕이 따사로운 날, 헌책방 ‘정은서점’을 찾아갑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서 찾아갑니다. 타고 온 자전거는 헌책방 앞마당에 세워진 ‘정은’ 아저씨 오토바이에 묶어 둡니다. 〈정은〉 아저씨는 집과 일터를 오갈 때만 타시니,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온 날은 아저씨 오토바이 앞바퀴와 제 자전거 앞바퀴를 자물쇠로 이어놓습니다.

책방에 들어섭니다. “안녕하셔요.” “어, 어서 와요. 오랜만이네. 요새는 어떻게 지내나?” “네, 그럭저럭 지내지요. 지난주에는 부산에 다녀왔어요.” “부산에? 부산에까지? 허허. 자전거 타고?” “하동에 아는 분 혼례잔치가 있어서 거기로 갈 때는 자전거를 탔고, 부산에서 서울 올 때는 기차 탔어요.” “아이구, 전국을 다 다니시는구먼. 그래 부산에는 무슨 볼일로?” “네, 부산에 보수동이라고 헌책골목 있잖아요?” “알지, 내가 여기(책방)에만 있어도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으니. 알지. 그런데?” “거기 보수동 헌책골목에서 해마다 ‘헌책골목잔치’를 하거든요.” “오, 그런 게 다 있어?” “네, 다른 거라면 몰라도 그런 잔치에는 빠질 수 없잖아요. 잔치하는 거 구경하려고 갔죠.” “그래, 사람들은 많던가?” “네, 지난해보다 올해는 좀 더 짜임새 있게 잘했고, 사람들도 늘 북적북적하더라고요. 다만, 행사할 때만 그렇게 북적대고, 행사 끝난 뒤에는 썰렁하면 안 될 텐데.”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만큼이라도 해서 사람들이 올 수 있으면. 부산은 참 잘 되어 있구만.”

‘정은’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그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여. 평생 한 곳에 묻혀서 바뀌지 않는. 자네는 참 자유롭게 사는구먼.” 하고 한 말씀. 곧이어, “예전에 언제더라 책방에 도둑이 든 적이 있는데, 아마 밤에 들어왔던가 봐. 아침에 와 보니까 가게 문이 열려 있려 있어. 보니까 돈통이 뒤엎어져 있어. 그때 100만 원쯤 도둑맞았지. 얼마 앞서인가, 연희동에 산다는 사람인데, 아, 고놈 사기꾼. 내가 삼십 년을 넘게 헌책방을 하면서 사기를 당한 적이 없는데, 이 구석에 가만히 있었어도 사기를 당한 적이 없는데. …… 그 사람이 나한테 와서 고서며 한적이며 (자기 집에 많이 있다고) 말하다가, 그 책들을 그럼 한 번 보여준다고 하더니,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신데, 병문안을 가 보고 와야 한다면서, 지금 현금이 없는데 과일값을 좀 빌려 줄 수 있겠느냐고 그래. 그래서 과일값 하라고 삼만 오천 원을 줬지. 그런데 그 다음부터 소식이 없어. 뚝 끊어졌지. …… 과욕이, 욕심 부리면 사기를 당해. 난, 책만 산다는 생각에 혹 하고 넘어갔지. 난생 처음 사기를 당해 봤어.” 하고 긴 이야기를 풀어놓으십니다.

그렇군요. 얼마 앞서 어처구니없는 사기꾼한테 걸리셨군요. ‘헌책방 임자 사기 치는 이야기’는 더러 듣는데, ‘정은’ 아저씨도 겪으셨네요. 그나마 더 크게 등떼먹히지 않아서 다행일 뿐입니다.

아저씨 나이도 벌써 예순 줄을 넘겼고, 하루하루 ‘헌책방까지 손수 찾아오는 발길이 잦아드는’ 가운데, 새로 들어오는 헌책 숫자도 자꾸 줄어듭니다. 이래저래 헌책방 장사를 할 만한 즐거움이 차츰 오그라든달까요. 이런 판에 못된 사기꾼한테 뒤통수를 맞았으니……. 아저씨 스스로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여” 하고 슬픈 한 마디를 읊으시겠지요.

〈2〉 책이란

‘정은’ 아저씨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골마루를 훑습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참으로 ‘새장에 갇힌 새’인지, 헌책방을 손수 찾아와 오랜 세월을 고이 이어가는 반가운 책 하나를 찾아내는 밝은 눈길이 없는 우리들이 ‘새장에 갇힌 새’인지 생각해 봅니다. 요즘은 나라밖으로 여행이며 출장을 다녀오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나라밖 구경을 많이 해 보는 사람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로운 새’라 할 수 있을까요. 헌책방 아저씨 아주머니들처럼 나라밖 구경은커녕 제주도 나들이조차 꿈도 못 꾸고, 좁고 어두운 헌책방 한편에서 젊음을 다 보내고 늚음 또한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좁은 눈길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일까요. 글쎄, 글쎄. 아니라고, 헌책방 아저씨나 아주머니는 새장이든 울타리에든 갇혀 있지 않다고 도리질을 쳐 봅니다. 그러나 우리 세상은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한숨 한 번 푸욱 내쉰 뒤 손바닥 책이 잔뜩 쌓여 있는 책꽂이 앞에 섭니다. 물끄러미 책탑을 위아래로 훑습니다. 무릎을 꿇고 밑바닥에 깔린 책을 살펴 나갑니다. 몇 가지 눈에 뜨이는 책이 보입니다. 이 책들을 끄집어내기에 앞서, ‘헌책방 구석에서도 높직한 책탑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 책’들은 어떤 책일까 싶은 생각이 불쑥. 이런 책들도 울타리에 갇힌 책일는지. 이제는 빛을 안 봐도 좋을 케케묵거나 고리타분한 책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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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황-판소리소사>(신구문화사. 1976)를 끄집어냅니다.

.. 알기 쉽게 말하자면, ‘소리’는 남을 즐겁게 하거나 감화를 주기 위한 객관적인 예술이고, ‘노래’는 나 스스로가 내 소감을 겉으로 나타내는 주관적인 예술이라고 하겠다 … 그러면 판소리는 어떤 예술인가? 판소리는 몇 시간이나 걸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같은 장편의 이야기를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서 혼자 부르는 것이 원식이다. 한 편의 가사 내용을 극적으로 분석하여 본다면, 판소리는 한 사람이 수십 명의 역할을 도맡은 극창이라 하겠다 .. 〈11?12쪽〉

판소리. 요즘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요즘 들을 수 있는 판소리는 어떤 판소리일까요. 책장을 좀 더 넘깁니다.

.. 가무, 줄타기, 재담, 농악 등의 연예로 공연하였으나 그들의 생활은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굿놀이든 줄타기든 악공이 따라야 하고, 그에 수행하는 종사원도 있어야 하는데다가, 당시의 사회 제도로서는 천대의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색해 낸 것이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고수 한 사람이면 되므로 자신이 가진 성악과 기예만을 구사하면 한 푼의 경비도 지출함이 없이 수입 전액을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주된 동기인 것이다. 더구나 왕도 서울에 올라와 명창으로서 이름을 펼치면, 임금의 총애를 받고 어전에 드나드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한 몸에 지닐 뿐 아니라 .. 〈23?24쪽〉

판소리도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서 우리들이 좋아하거나 반기거나 섬기는 여러 가지들은 지난날에는 그토록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뭐, 어려운 보기를 들 것 없어요.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그림쟁이들, 고호나 밀레 같은 그림쟁이들은 어떠했나요. 살아 있는 동안 딱 하루라도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고기를 반찬으로 삼아 배불리 먹어 본 적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2000년대인 오늘날까지도 헌책방은 우리 사회에서 아주 밑바닥에 깔린 채, 따순 손길은커녕 애틋한 눈길 한 번 제대로 못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헌책방도 앞으로는 언젠가 고운 빛줄기 하나 내려앉으며 제 대접을 받을 날이 있을는지.

<카지무라 히데키/김인덕 옮김-재일조선인운동(1945?1965)>(현음사. 1994)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일본사람이 ‘재일조선인운동’ 역사를 갈무리하다니. ‘부끄럽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제기랄’이라는 말이 곧이어.

.. 좌파 중에는 전향자도 있고 이미 전향하여 감옥에서 나와 초기 조련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상당수의 좌파는 전향하지 않고 옥중에서 일관되게 전쟁 중인 황민화정책 시기에도 투철한 생활방식을 견지했던 것입니다. 우파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우파에서 활약한 사람 가운데에는 사무능력 등에 있어 우수하여 이미 전쟁 중에 협화회 등의 활동에 관련되어 왔던 사람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중의 생활방식의 차이가 대중이 좌우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를 정하는 데 가장 큰 기준이 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 즉 대일 협력자를 중심으로 해서는 해방 후인 이제부터 운동을 제대로 해 갈 수 없기 때문에 확실한 대일 협력자는 배제하고, 적어도 운영의 중심에는 양심적인 자가 취임해야 한다는 논리가 조련의 운동 중심을 장악해 갔습니다 .. 〈26쪽〉

한국사람은 ‘재일조선인운동’에 눈길을 안 둡니다. ‘한국노동운동’에도 ‘한국학생운동’에도 눈길을 안 둡니다. 눈길을 두는 운동이라면 야구, 축구, 농구, 배구, 골프, 스타크래프트 따위. 같은 운동경기라도 핸드볼, 하키, 체조, 육상, 펜싱 들은 찬밥.

.. 그런데 건청, 민단을 조직한 초기 단계에 중심이 되었던 사람들은 결국 1948년 이후 이승만 정부가 재일 민단운동을 통제할 때 민단조직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를 대신하여 바뀐 담당자가 이승만의 생각과 구상에 따라서-이때는 이미 전전의 대일 협력은 문제가 되지 않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상부에서의 편성 기준이 되었다- 민단의 중심이 잡혀가고 민단의 질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 〈30?31쪽〉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우리 발자취를 알도록 이끌어 주는 고마운 책이구나 싶습니다. 하나하나 새길 만한 이야기가 담긴 책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을 저 같은 헌책벌레 한 마리가 읽어 본들 무슨 뜻이? 무슨 쓸모가? 무슨 값이? 만 사람이 알고 만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한 사람이 알고 한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는 어디 실려서 이야깃감이 될 만한 조그마한 귀퉁이조차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헌책방 〈정은서점〉 아저씨가 아니라 최종규라는 헌책벌레 한 마리야말로 ‘새장에 갇힌 새’로구나 싶습니다.

〈3〉 슈베르트를 생각하면서

손바닥책 <슈베르트>(신구문화사. 1977)가 보입니다. 덥석 집습니다. “아이고야 반갑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얼마 앞서 이 책을 한 번 만났지만 그때는 ‘잘못된 책(파본)’이라서 껍데기만 ‘슈베르트’였고 알맹이는 다른 책이었거든요.

.. 얼마나 기뻤을까! 이제 대기를 가슴이 벅차도록 마셔들일 수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자유!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작곡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또한 그리운 비인 생활을 벗들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자유! 그러나 먹고살아야 한다. 슈베르트는 개인 교수의 일자리를 찾은 끝에 몇 군데 일자리를 얻었으나 거의 무수입에 가까왔다 .. 〈62쪽〉

아, 얻은 것이 ‘자유’라면 잃은 것은 ‘먹고살 돈’. 지금 제 처지하고 거의 같군요. 하지만 좋습니다. 먹고살기 아무리 팍팍하더라도 곧 굶어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니 말입니다. 왜냐고요? 벗이 있으니까, 깊은 속마음을 읽어 주는 벗이 있으니까요.

.. 1818년 11월 슈베르트는 비인으로 돌아갔다. 친구들과 다시 만나고, 그들에게 작곡한 작품 전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아버지는 리히텐탈의 국민학교 교원 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슈베르트는 완강히 거절했다. 격렬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몹시 화가 난 아버지는 다시금 아들을 쫓아내고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엄금했다. 슈베르트는 별로 상심하는 빛도 없이 음악 개인 교수를 다시 시작하여 전대로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 가장 좋아하는 일에 가벼운 마음으로 되돌아갔다. 쓰고 쓰고, 또 쓰고?쉴 새 없는 창작. 그는 방과 피아노를 빌 돈이 없었다. 그것은 친구들이 마련해 주었다 .. 〈65?66쪽〉

<슈베르트>를 쓴 폰 란돌미 님은 여기서 제 마음에 아주 깊이 파고든 말 한 마디를 붙입니다. “두 친구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하고, 가난 속에서도 대단히 행복했다(66쪽).” 그렇습니다. 가난하지만 대단히 행복한 삶, 저는 바로 이런 삶을 바랍니다. 좋아합니다. 행복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즐겁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떨립니다.

.. 그는 아침 여섯 시부터 걸상에 마주앉아 끈이 보이는 낡은 옷을 입고, 그대로 오후 한 시까지 작곡했다. 이따금 파이프담배를 태우거나 찾아온 친구들과 잡담하기 위해 일손을 쉴 뿐이었다. 방은 작았으나 겨울에는 덥지 않았다. 화기가 없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꽁꽁 얼었으나 창작욕에 불타 추위를 몰랐다. 사람이 와도 때로는 “재미 어때?” 하고 물을 뿐 붓을 놓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온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잘 알았다. 친구는 그대로 살그머니 돌아가는 것이었다 .. 〈67쪽〉

저는 벌이가 없이 살고 있습니다. 벌이가 없지만 그냥 삽니다. 하고픈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버틴다고 할 수 있고,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이렁저렁 도와줍니다. 살 집이 없다고 하니, 방 한 칸 함께 쓰자고 내어주는 분이 있습니다.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책 살 돈도 없을 텐데’ 하면서 밥이나 술을 사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모두 참 고맙습니다. 언제 이분들한테 빚을 갚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저 머릿속에 깊이깊이 새겨 두며 고마움을 받아먹을 뿐입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방에서 일하면서도(글쓰기) 더위와 추위를 그냥 받아들입니다. 선풍기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선풍기 돌릴 전기세가 없습니다. 불을 때고 싶으나 불 땔 돈이 없습니다. 되도록 참고 옷을 얇게 입거나(여름) 두껍게 입을(겨울) 뿐입니다.

.. 슈베르트가 서먹서먹해 한 곳은 에티켓이 까다롭고 격식만 따지는 상류 사회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묵묵히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 구석에 숨어 있었다 .. 〈71쪽〉

본 적이 없는 슈베르트. 잘은 몰라도 이분 노래를 적잖이 들었을 테고(길에서든 학교에서든), 이분 노래를 들으며 제 마음도 평화로웠을 텐데, 이러한 평화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떤 느낌으로 우리한테 다가왔을지 가만히 헤아려 보게 되는군요. 슈베르트라는 분 이야기를 읽으며 힘을 냅니다. 불끈.

〈4〉 환경책 꾸러미

<레스터 브라운/여형범 옮김-플랜 B>(도요새. 2004)라는 책이 보입니다. ‘도요새’에서 펴낸 몇 가지 환경 책도 보입니다. 새 책이군요. 어디서 흘러나왔을는지. 나온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어떤 창고에서 나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도요새’는 ‘환경운동연합’이라는 시민단체에서 꾸리는 출판사입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 있고 회원 많고 큰 환경모임입니다. 이곳 영향힘은 제법 셉니다. 처음에는 ‘공추련(공해추방운동연합)’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뒷날 ‘환경운동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이곳에서는 <함께 사는 길>이라는 잡지를 다달이 펴냅니다. 저는 예전에 이 잡지를 꾸준히 사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안 봅니다. 헌책방에 드문드문 보여도 구경조차 않습니다. 아쉽다면 아쉽고, 이들이 걷는 길이 그런 길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환경운동연합’에서 보여주는 슬픈 모습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다 접고, 이곳에서 연 출판사 ‘도요새’ 이야기를 해 보지요. 환경운동연합은 예전부터 출판사를 따로 등록하려고 했지만, 오래도록 이를 미루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조그맣기는 해도 꿋꿋하게 환경책을 펴내는 출판사가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따로 출판사를 열면 누구한테 피해가 돌아갈지는 뻔한 노릇. 그러나 돈 많은 시민단체 가운데 몇 손가락에 꼽히는 환경운동연합은 끝내 출판사를 등록하고 책을 냅니다. 처음에는 환경책 내는 출판사에서 못 건드리는 책을 냅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오래 안 갑니다. 이른바 ‘다른 출판사에서 낼만 한 책 미리 차지하기’를 하지요. 그리고 ‘따님’에서 펴내던 《지구환경보고서》를 물려받습니다. ‘따님’ 출판사는 어려운 형편임에도 1990년부터 이 책을 부지런히 옮겨서 펴냈습니다(1998년까지).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첫판조차 제대로 팔린 일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연합은 회원이 대단히 많습니다. 《함께 사는 길》도 여러 만 부를 찍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책 《지구환경보고서》 같은 책을 환경운동연합에서 널리 알리면서 팔아 주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소개글이야 있었지요. 그러나 환경운동연합 같은 단체에서 할 일은 소개글 써 주기가 아니에요. 자기네 회원들이 이 책을 해마다 한 권씩 받아 보며 곰곰이 되씹어 읽으며 깨닫도록 해 주는 일입니다.

요즘은 ‘도요새’ 이름으로 <지구환경보고서>가 나옵니다. 2001년부터 나왔지 싶은데, 출판사가 옮겨지면서 책값도 부쩍 올랐습니다. 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또 자본주의 논리로 움직이는 책마을 흐름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환경운동연합이라는 시민단체도 이런 자본주의 흐름을 똑같이 타는 곳이란 소리인지요. 궁금할 뿐입니다. 그리고 슬픕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환경책을 전문으로 내는 출판사마다 책 1000권도 못 팔고 이 책들마저도 재고 다루기로 애먹고 있는 우리 형편을 생각해 볼 때, 환경운동연합 같은 시민단체가, 또 녹색연합 같은 시민단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들 단체마다 회원 수가 몇 만임을 내세우고, 해마다 회비로 거두어들이는 순이익이 얼마라고 자랑을 하는 일이 무슨 뜻이 있고 값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도요새’에서 처음 펴낸 책 세 권은 작고 가벼운 판이라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고침판을 내면서 판이 커집디다. 요즘 ‘도요새’에서 나오는 책도 다 비슷합니다. 어차피 책을 낸다고 해도 좀 더 작고 가볍고 값싼 책을 내주면 좋지 않을까요.

〈5〉 그래도 책을 사면서

얼추 책 구경을 마쳤다 싶을 때, 큼직한 책 (外文出版社. 1989)가 눈에 들어옵니다. 책이름이 재미있네 싶으나, 이 책 위에 깔린 책탑을 보고는 ‘에이, 꺼내기 힘들겠다. 그냥 가자’ 하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오늘 아니면, 지금 아니면 나중에 언제 이 책이 무슨 줄거리를 담은 책인지 알겠어? 잠깐 구경하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1?2분이면 되잖아‘ 하고 생각을 바꿉니다.

위에 얹힌 책더미를 옆으로 옮기며 꺼낸 . 미국말로 된 책, 그림을 담은 책, 그림을 그린 사람은 Qi Baishi(1864?1957)라는 사람. 그림을 찬찬히 보노라니 어딘가 낯익은 그림. 누구지? 아하, 그래, 이 사람, 제백석(齊白石)이구나. 제백석 님 그림을 그러모아 미국말 판으로 낸 책이구나.

뜻밖이로군요. 제백석 님 책을, 그것도 중국에서 펴낸 책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나라 안에도 이분 책이 몇 가지 나오기는 했지만, 이만큼 도판을 넉넉하게 실은 책은 아직 없습니다. 또한 도판이 이렇게 깨끗한 책도 없어요. 중국 정부에서 낸 책이니 이렇게까지 묶을 수 있었겠지요. 어마어마한 보물입니다. 이 보물은 언제부터 이 자리에 이렇게 깔려 있었는지?

책값을 셈할 때 ‘정은’ 아저씨한테 여쭈어 봅니다. ‘꽤 오래’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여태껏 ‘정은서점’을 들렀던 다른 책손은 이 책을 값어치 없는 책으로 지나쳤거나 ‘제백석이 누구인지 몰랐’거나, 이 책 위에 얹힌 높은 책더미에 엄두를 못 냈다는 이야기. 헌책방 헌책에는 다 임자가 있는 법이라는데, 제가 그 임자가 된 셈인가요.

제백석 님 그림책 덕분에 만만치 않은 책값을 치릅니다. 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책 하나, 아니 <판소리소사>라는 책, <슈베르트>라는 책, <재일조선인운동(1945?1965)>이라는 책, 여기에다가 라는 책을 만나며 비로소 ‘헌책방 정은서점 아저씨는 새장에 갇힌 새’가 아님을 느낍니다. 헌책방 ‘정은서점’아저씨는 새장 바깥에 있는 문가에서 우리들이 어서 새장을 벗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새장에 갇힌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고, 헌책방마다 또는 새책방마다 또는 도서관마다 우리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는 책들을 하나씩 캐내고 찾아내고 만날 때 시나브로 새장을 벗어날 수 있구나 싶습니다. 헌책방 아저씨는 우리들이 새장을 벗어날 수 있도록 문지기 노릇을 하는 분들이지 싶습니다. 새장에 갇힌 줄 모르고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헌책방 아저씨를 새장에 갇힌 사람으로 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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