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고 있는 길` 생각하게 하는 책
`내가 걷고 있는 길` 생각하게 하는 책
  • 북데일리
  • 승인 2007.02.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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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나하고는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느껴지는 사람들 책을 읽습니다. 저하고는 참 동떨어져 있구나 느껴지는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가만히 보면 보는 눈길과 하는 일은 다를 뿐, 저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믿는 길을 걷는 모습은 비슷하구나 싶습니다. 하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할 수 없겠지요. 이렇게 똑같기만 한 세상이라면, 모든 것을 네모나 세모나 다섯모라는 틀에 가두어 바라보아야 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고 지루할까요. 다 다른 자리에서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제가 걷는 이 길이 저한테 얼마나 아름다운지, 즐거운지, 신나는지, 올바른지 곱씹어 봅니다.

<감독의 길>(민음사. 1994)

1960년, 박정희는 《지도자도》라는 얇고 노란 책자를 펴내 전국 곳곳에 수없이 뿌립니다. 그러나 이내 이 노란 책자를 거두어들였고, 전국 곳곳에서 불을 지펴 집어던져 태워 버립니다(이 책자를 저한테 팔았던 헌책방 주인과 다른 책손이 들려준 이야기). 자신이 내세운 혁명공약 가운데 마지막 것,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때문입니다. 그 뒤 ‘혁명공약’은 다섯 가지만 적어서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러면서 펴낸 책은 《지도자의 길》. 독재자 박정희한테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고, 지도자라는 사람이 걷는 길이란 무엇이었을까요.

.. 단지 법이 규정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진아들을 강제로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어린이들의 성장은 제각기 다르다. 일부 다섯 살 아이는 일곱 살 아이의 지능을 가질 수도 있고, 반대로 다섯 살 아이 수준의 지능도 안 되는 일곱 살 아이도 있다. 지능은 아이마다 다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이다. 1년의 성장이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1년 동안의 기간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잘못이 아닐 수 없다 .. 〈31쪽〉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길’은 사람이 다니라고 뚫습니다. 자동차가 오가는 찻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탄 사람이 다니는 길입니다. 찻길에 자전거가 다닌다면, 자전거가 다니는 게 아니라 자전거를 탄 사람이 다닙니다. 그러나 찻길을 달리는 자동차꾼은 찻길에 함께 있는 자전거꾼을 못마땅해 합니다. 자전거에 탄 ‘사람’이 자기와 마찬가지 ‘사람’임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도》와 《지도자의 길》을 낸 독재자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다스리려는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사람 위에 올라서서 권력을 누리’려는 마음이었을까요. 자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인 이 나라 백성들을 굽어 살피고 헤아리고 보살피는 ‘길’이었을지, 이 나라 백성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며 자기 앞에 굽실거리거나 무릎 꿇게 하려는 ‘길’이었을지.

.. 나는 내 눈으로 자세히 볼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또한 나는 물증이 있는 것들만 믿는다 .. 〈103쪽〉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자동차만 다니는 길이 되어 버린 찻길입니다. 그래서 이 찻길을 걸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수없이 차에 치여 죽습니다. 사람을 친 차는 어디론가 내빼도, 차에 치인 사람은 어디로 가지도 못합니다. 사람이 아늑하게 다닐 수 없게 된 길에서는, 사람 아닌 목숨도 목숨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두 다리로 걷는 사람이 오가는 길은 네 다리로 걷는 들짐승과 멧짐승도 오갈 수 있었습니다.

열 다리나 스무 다리로 기어 다니는 벌레도 오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찻길을 건너는 짐승들은 그 자리에서 개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꼬물꼬물 기어가는 지렁이나 벌레는 자국도 못 남기고 사라집니다. 더욱이, 사람만 다니라고 하는 거님길(보도블럭)까지 치고 올라서는 자동차입니다. 길이 길 구실을 못하는 우리 삶터이고, 길을 마음 놓고 다닐 수 없는 우리 형편이라고 할까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아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기억력일지도 모르겠다 .. 〈63쪽〉

언제부터 우리가 걷는 길이 이렇게 팍팍하고 메마르게 되었을까요. 어느 때부터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이렇게 사람은 다닐 수 없는 길이 되었을까요. 사람 발길이 끊어지고 매캐한 차방귀만 가득한 길, 사람 냄새도 손길과 발길도 움직임도 뚝 끊어지는 길이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우리들이 걸어갈 이 길을 엉망으로 망가뜨리면서, 우리들이 참답게 살아가는 길마저도,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마저도 엉망으로 흐트러뜨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 1930년 토키 영화가 등장하고부터, 우리는 옛 무성영화의 너무도 훌륭했던 점을 놓치고 잊어버렸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었다. 나는 미학적 손실을 끊임없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려면 영화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나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 〈321쪽〉

길이 길다움을 잃었을 때, 이 길을 오가는 모든 것도 자기다움을 간직하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지도자든 백성이든 관리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든 사람 아닌 목숨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오붓하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길이 아니니까, 서로서로 돌보고 마음 쓰면서 보듬는 길이 아니니까, 서로 따스함을 나누며 사랑하며 믿고 살아가는 길이 아니니까, 이런 길에는 돈-이름-힘, 이 세 가지만 남는구나 싶어요.

자서전 <감독의 길>을 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돈으로 걷는 길도 아니고 이름으로 걷는 길도 아니며 힘으로 걷는 길도 아닌, 한 사람으로 걷는 길을 걸어서 감독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사람다움을 간직하고 사람다움을 키우면서 사람다운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면서 감독으로 길을 걸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나라 영화감독 가운데 돈-이름-힘이 아닌 ‘사람으로서 걷는 감독이 갈 길’을 걷는 사람은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북센스. 2006)

낮부터 눈이 내렸습니다(이 글을 처음 쓴 보름쯤 앞서는. 오늘은 겨울비가 내리는군요). 이제 눈은 그쳤습니다. 조용한 밤입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차 다니는 소리도 안 들립니다. 좋습니다. 이 조용함이 좋습니다. 모든 것을 하얗게 덮은 눈을 보면, ‘아, 이제 이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또 꼼짝 못하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히유, 얼어붙은 눈이 녹으려면 또 한참이 더 있어야겠군’ 하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눈이 마냥 밉지 않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미운 마음이란 없습니다. 겨울이니까 눈이 와야지요. 오더라도 펑펑 와야지요. 펑펑 와서 길이 다 막히고 무릎이 푹푹 잠겨야지요. 겨울인걸요.

-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1급수 맑은 물에만 사는 물고기들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34쪽)

이제 날이 새고 아침이 밝아 오면 길을 쓸고 치우는 손길로 부산할 겝니다. 차 많이 다니는 큰길에는 모래를 뿌린다고, 염화칼슘을 뿌린다고 법석이겠지요. 눈이 오는 날, ‘이야, 흰눈이다. 눈이다. 펄펄 내리는 눈이다!’ 하면서 소리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습니다. 눈싸움을 하자고, 눈사람을 만들자고, 눈놀이를 하자고, 눈사진을 찍자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을 찾기 힘듭니다.

생각해 보니, 눈이 펑펑 내려 길을 덮어도 사람들 지나다니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걸어 다닐 때 조금 미끄럽다고는 하지만, 글쎄, 그렇게까지 미끄러웠는가 모르겠어요. 길을 쓸거나 치워야 한다면, 모두 차가 잘 다니라고 쓸거나 치우지 않을까요?

..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된 중개상과 다국적 기업들은 콩고의 광부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고 국립공원이 얼마나 파괴되었고 고릴라들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 〈24쪽〉

눈이 펑펑 내린 날은 버스도 쉬고 기차도 쉬고 비행기도 쉬고, 모두모두 쉬면 어떨까요. 청소부도 쉬고 구멍가게도 쉬고 신문사 배달직원과 우유 아줌마도 쉬면 어떨까요. 구두닦이도 쉬고 길거리 장사꾼도 쉬고 은행도 쉬면 어떨까요. 먹고살아야 하니 쉴 수 없고, 먹고살아야 하니 차가 싱싱 달릴 수 있게 재빨리 길에 쌓이는 눈을 후다닥 치워야 할까요.

.. 덤은 많이 못 줘도 비닐봉지 인심은 풍년이다. 애써 장바구니를 챙겨 온 내 손이 부끄러워진다. 대형할인점은 아예 야채와 과일을 따로 포장해서 가격표를 붙여 준다. 때문에 장바구니를 들고 가도 별 쓸모가 없다. 장을 볼 때마다 찬장에 비닐봉지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마다 비닐봉지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마음이 씁쓸해진다 .. 〈84?85쪽〉

아침에 일어나면 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불을 끄고 눕는데 창밖에 환합니다. 달빛과 별빛은 없는 밤이지만 온누리를 하얗게 덮은 눈 덕분에 바깥이 환하게 보이는군요. 도시에서도 온 동네 불빛이 다 꺼진다면 세상이 온통 밝고 하얗게 보일 테지요(그럴 일은 없겠지만). 밤에 눈빛이 얼마나 하얀지, 또 밝아 온 아침에 눈이 얼마나 하얀지 느낄 수 있겠지요.

.. 외출해서 차를 기다리고 차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걷는 짧은 시간만 추위를 느낄 뿐이므로 굳이 내복을 챙겨 입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옷맵시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들은 두꺼운 내복이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원한다면 겨울철에 반드시 내복을 입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수입하고 있다 .. 〈113?114쪽〉

겨울다운 겨울을 잃는 우리들은 봄다운 봄을 잃고 여름다운 여름을 잃습니다. 지난해 가을은 여태까지 맞이한 가을 가운데 가장 ‘가을답지 않은 가을’이었습니다. 하지만 2007년 가을은 지난해보다 더 ‘가을답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우리들 씀씀이는 줄지 않으니까요. 자동차를 사려는 우리 마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입으로만 ‘가까운 거리는 걷자’고 읊고, 몸으로는 죽어도 안 걸으려고 하니까요. 그러면서 늘 같은 말을 되뇌이겠지요.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눌와. 2005)

재미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딱히 잡혀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꼭 이래야 하거나 저래야 하는 법이 없으니 재미있지 싶어요. 시험을 치를 때 꼭 100점을 맞아야 하지 않아요. 99점만 맞아도 좋아요. 뭐, 80점으로 흐뭇할 수 있고, 50점만으로도 기쁠 수 있습니다. 10점이나 5점 맞고 웃을 수 있어요. 제 고등학교 때 성적표를 보면, 영어 94점, 한문 97점, 수학 24점, 윤리 51점, …… 이랬습니다. 수학점수가 10점대였던 적도 있지 싶고 골치아픈 서양철학만 외우게 하는 윤리는 30?40점에 머문 적도 있지 싶습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좋았습니다. ‘난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더 많이 할 테야’ 하고 생각했거든요.

.. 나는 누군가 다른 이의 삶을 살고 있다. 근사한 레스토랑과 유쾌한 사람들, 아카데미니 그래미니 하는 각종 행사들로 채워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다. 24년을 함께 산 남편과 나는 유명 인사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고, 최근 영화들을 시사회에서 감상한다. 로스앤젤레스의 도서 관련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초대된다. 남편이 유명한 잡지의 편집자문 일을 하는 덕분에 우리는 남들이 흔히 누리지 못하는 특권과 화려함으로 채워진 삶을 구가한다. 하지만 이젠 그런 자리에 가더라도 특권을 향유한다는 뿌듯함 대신 눈부신 화려함이 왠지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은 나라고 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명품의 세계에 살고 있다 .. 〈13쪽〉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난 내가 살고픈 대로 살 테야’ 하고 마음먹으면서 살고 있고, ‘난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을 테야’ 하면서 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읽습니다.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기를 즐기는데, 올겨울에는 손발이 많이 시려워서 때때로 고속버스를 타고 1시간쯤 따뜻하게 가곤 했습니다. 얼어붙는 손발을 부여잡고 낑낑대며 달릴 때에는 ‘참 괴롭구나’ 싶었지만, 글쎄, 괴롭기는 해도 즐겁더군요. 더우면 더운 대로 ‘이게 바로

더위구나’ 하고 느꼈고, 추우면 추운 대로 ‘이게 바로 추위구나’ 하고 뼛속 깊이 느꼈습니다.

고속버스를 타면 몸은 느긋했지만, 마음은 무겁습디다. ‘이거 너무 몸이 느긋하게 다니는 셈 아닌가’ 싶었고, 돈 몇 푼(찻삯)으로 자꾸만 손쉬운 길을 가면 마음까지 흐물흐물 늘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더군요. 그래서, 고속버스에서 내린 뒤 다시 추위를 와락 껴안으며 달릴 때면 참 시원하데요. 그 짜릿한 추위와 칼바람이란! 하하!

.. 지금은 내가 선택한 삶의 자유와 독립을 구가하는 중이다. 만약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면 니카라과에는 결코 가지 못했을 것이다 .. 〈117쪽〉

곧 설 명절이 다가옵니다. 설 명절에 부모님 집에 갈까 말까 망설입니다. 저는 제가 살고픈 대로 살기 때문에, 저 한 사람한테는 좋다고 하겠지만 이웃사람, 이 가운데 집안 식구들한테는 썩 좋지 못합니다. 혼인과 이혼도 멋대로 했으니 집안 식구들로서는 달가웁지 않겠지요. 제 둘레에 있는 다른 분도 비슷하리라 봅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다고 느끼는 일이지만, ‘야, 니가 고생하며 사는 걸 너 빼고 누가 좋아하겠냐?’ 하고 말하는 선배들 말을 들으면, ‘그렇구나. 나는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질구질하게 뭐 하는 짓이냐고 느끼겠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지내는 시골집을 슥 둘러보시더니 ‘무슨 피난민 수용소 같네’ 하던 부모님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 코네티컷의 부모님 댁에서 일주일을 머문다. 두 분은 내 인생에 대해 무척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신다. 딸이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꾸리길 원하신다는 걸, 내가 아무리 행복하다고 말해도 믿지 않으신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래도 당신들이 더 잘 안다. 여자는 남편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걸. 그게 인생이라는 걸. 엄마는 딸과 이혼한 옛 사위에게 얼마 전에 생일 선물을 보냈다고 얘기하신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내심 우리가 다시 화해하기를 바라신다 .. 〈89쪽〉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셈일까요? 남들이 말하는 잘사는 삶을 꾸려야 할는지, 집안 식구들이 말하는 잘사는 삶을 꾸려야 할는지, 아니면 자기가 생각하는 잘사는 삶을 꾸려야 할는지요? 이 모두가 하나로 모일 수 있는 삶을 꾸려야 잘사는 삶일까요?

.. “의료 교육을 받으셨나요?” 내가 묻는다. “아니오.” 그녀가 대답한다. “그렇지만 엄마들이라면 다 아는 일들인걸요.” 그녀는 자식이 다섯에, 손자는 열다섯 명을 두었다 .. 〈106쪽〉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난 미국여자 한 사람이 세계 여러 곳을 두루 다닌 이야기를 끄적였나 싶어 따분할지 모르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남 보란 듯이 꾸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즐겁게 꾸리는 삶’을 찾고자 위자료 한 푼 안 받고 이혼을 마음먹은 뒤, 제3세계를 중심으로 홀몸으로 낯선 세상과 사람들을 부대끼는 이야기임을 깨달은 뒤에는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군요.

남들 따라 살지 않고 나 따라 살아가니까 그럴까요. 한 번 살고 떠나는 이 세상에서 굳이 미련이나 아쉬움을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자유롭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살아가니까 그럴까요. 더 많이 움켜쥐거나 가지려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부대끼고 즐기려는 삶이라서 그럴까요. 떠날 때는 바람, 머물 때는 햇살. 그래, 그렇군요. 가볍게 살되, 한 자리에 머물 때는 따순 마음을 펼칠 수 있어야겠군요. 저는 바람처럼 살는지 모르나 햇살처럼 못 머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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